19세기 기차의 등장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달리는 기차를 그린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영국 런던, 증기로 달리는 열차에서 한 노신사가 밖을 향해 몸을 쭉 내밀었다. 시속 300킬로미터의 KTX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다행히 그 시절 기차의 시속은 20~30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말이나 당나귀가 이끄는 수레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속도였다. 그는 열차와 한 몸이 된 경험을 바탕으로 1844년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뿌연 안개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속력을 내는 증기기관차가 당장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움직이는 기차의 역동성을 최초로 표현한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역작이다.
1775년 런던에서 태어난 터너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발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열두 살 터너의 그림을 가게에서 판매할 정도로 아들의 재능을 자랑스러워했다. 훗날 터너가 작업실을 차렸을 때, 이발소를 그만둔 아버지는 조수를 자처해 아들을 뒷바라지한다.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있어서였을까. 터너는 평생으 그림에 매진한다. 열네 살 터너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 견습생으로 입학하며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20대에 정회원, 30대엔 교수가 되어 성공 가도를 달린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국과 유럽 등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이 본 풍경은 물론, 경험한 사건을 쉴 새 없이 그렸다. 말년인 60~70대에도 수없이 많은 여행 스케치를 남겼다. 호기심은 멈출 줄 몰랐다. 그의 눈엔 늘 새로운 게 보였다. 그런 그가 열차의 속도감에 매료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보다 더 대단한 일화가 있다. 1842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60대 중반의 터너는 증기선 돛대 위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밧줄로 몸을 묶은 후 4시간 동안 거센 비바람과 파도를 관찰한다. 그 결과 풍랑 이는 바다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작품 '눈보라'를 완성한다.
천부적 재능에 호기심과 열정, 노력이 더해지니 당할 자가 없었다. 물론 그의 작품이 늘 호평받은 건 아니다. 그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린 그림에 익숙했다. 터너의 추상적인 화풍은 대중에겐 낯선 것이었으나 그는 그런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뚝심은 후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모네는 터너의 그림에 감명받아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작품 활동에 전념한 결과, 상당한 재산을 모은 그는 예상외로 고독한 말년을 보낸다. 1838년 왕립 아카데미 교수직을 사임하고, 1년 후 첼시의 작은 별장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긴 채 산다. 1851년 생을 마감한 그의 작품은 영국 테이트 브리튼에서 만날 수 있다. 미술관 건립이라는 조건 아래 자신의 모든 작품을 정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수집가도 아닌 영국의 유산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화가로서 자긍심이 돋보이는 결정이다. 그 자부심이 독보적 영역을 개척해 낸 원동력이 아닐까. 생동감 넘치는 윌리엄 터너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