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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촌자 Jan 30. 2020

성자의 코무네, 힐링 마을 아씨시

이탈리아 사진 기행

이른 아침 서둘러 테르미니 역에 도착. 아씨시행 열차에 탑승한다. 로컬 열차라서 그런지 열차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플랫폼이 배정되고 15분 정도 있다가 바로 출발. 그러니 역에 도착해서 열차 없다고 당황하지 마시라.  

암브로시아 주 페루자행 열차. 페루자는 어쩌다 FC 감독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로마 기차역에서 아씨시 역까지 2시간 30분. 아씨시 마을 입구까지는 버스를 이용한다. 

행정구역상으론 움브리아주(州) 페루자도(都) 아씨시 코무네 되시겠다. 코무네는 기초자치단체로서 대도시에서부터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규모에 상관없이 모두 코무네라고 부른다. 

마을 제일 왼쪽 끝에 위치한 산 프란체스코 성당.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괴테는 "바빌론식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하층 건축에 혐오감을 느끼고 그냥 지나쳐 올라간다"라고 쓰고 있다. 혐오감이라고까지 할 이유가 어떤 것이 있을까. 바빌론식 건축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석재를 구할 곳이 없어 흑벽돌로 쌓아 올려서 건축을 하며 대부분 백색의 회반죽으로 마감을 한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뒤 남아있는 건축물이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덤덤한 것은 알겠는데 혐오감까진 아직 모르겠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가난과 겸손을 신조로 삼고 엄격한 금욕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으니 그분을 추모하는 성당을 화려하게 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성당 건물은 어떠한 미사여구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간결하다. 기교 없이 쌓아 올린 벽돌에 흰색 회반죽 마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바벨탑 by Pieter Bruegel the Elder (1563)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ower_of_Babel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풍부한 문물을 바탕으로 뛰어난 문명을 갖고 있었으나 워낙 평지에 위치하여 외부의 침입이 잦아 지구라트라는 방어용으로 쌓은 성벽이 많았다. 특히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풍부한 아스팔트를 활용하여 건축기술 또한 발달했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기에 와서는 높이 91미터 폭 91미터의 바벨탑을 쌓아 올릴 정도의 자본과 기술을 축적해 놓고 있었다. 바벨탑 꼭대기에는 푸른 자기 벽돌로 울트라 마린을 입혀놓을 만큼 미적 감각도 탁월했다. 

CC SA License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이슈타르의_문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 울트라 마린 푸른 벽돌이 만들어내는 파랑 노랑 보색 대비가 화려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바빌론 문명은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에게 종속되어 아랍으로 흘러들어 갔고 키루스 왕은 바벨탑이 감시탑으로 사용될 것이 두려워 파괴한다. 또한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면서 그리스를 포함한 유럽 세계로 그 문명이 전파되는데,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자신의 왕국의 수도로 삼고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전에 머무르며 대규모 개발 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바빌론의 문명에 매료된다.

하지만 이들의 잔혹함 또한 엽기적이다. 기원전 1700년경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동해보복의 원칙> 함무라비 법전이 성문화 되어 총 282개 조항으로 되어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니 웬만하면 사형이다. 법전 1조, 누군가를 살인죄로 고발했는데 그 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고발한 사람 사형. 뭐 이런 식이다. 이 당시가 유목이나 수렵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넘어가던 시기여서 다툼이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감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과천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형이 생활화(?) 되어 있으니 잔혹할 수밖에 없다.  


괴테의 바빌론식 건축에 대한 혐오감은 그들의 잔혹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한다.

젊은 시절 십자군 전쟁에 나갔다가 패잔병의 몰골을 하고 돌아온 프란체스코의 모습. 이후 낮은 자를 위해 싸우는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기로 깨달음을 얻는다. 

길게 이어진 아치형 회랑 너머로 움브리아 평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양지바른 곳인 데다가 기운까지 넘치니 힐링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다음 일정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 분의 뒷모습이 프란체스코 기마상과 묘하게 겹친다. 영어 Saint의 스페인어 버전에서 기원한 San과 Santa는 성인 호칭에 자주 등장하는데, San은 남성 명사 앞에 붙고 Santa는 여성명사 앞에 붙는다. 그래서 프란체스코 성인은 San Francesco라고 하고 그분의 설교에 감명받아 수도회에 가입한 클라라 성녀는 Santa Chiara.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도시 이름에 캘리포니아로 미션을 떠나온 분들이 이름이 많은데,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산타모니카, 산타루치아, 산타마리아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산타클로스는 남자인데 왜 산타냐고 따지셔야 한다. 다행히도 산타클로스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하지 않고 네덜란드어 Sante Klaas에서 유래했다. 

돌, 벽돌 그리고 테라코타의 아기자기한 조화가 돋보이는 동네 풍경. 어느 하나 튀어나오는 것 없이 잔잔하다. 

검소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당당하기까지 하다.

좁디좁은 골목도 정리가 되니 차가 2대가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넉넉하다. 

오른편 위로는 미네르바 신전 건물이 보이고 정면엔 성 프란체스코가 설교를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산 루피노 성당이 보인다. 관광객들도 성지 순례하듯 조용조용 마을을 돌아본다. 

피아자 델 코무네 광장. 앞서 언급한 대로 코무네는 기초자치단체니까 마을광장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왼편으로는 괴테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을 무시하면서까지 서둘러 보고자 했던 미네르바 신전이 있다. 

CC BY Georges Jansoone 2.5 Licens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emple_of_Minerva,_Assisi#

미네르바는 그리스 여신 아테나와 동격으로 지혜와 군사전력을 관장한다.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으며 현재는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교회로 사용 중이다.  괴테가 “내가 본 고대 건축물 중 가장 완벽한 것이 내 눈앞에 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마지않았는데 괴테 일정상 아직 로마에 도착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미네르바 신전을 보고 그 난리를 쳤으니 로마에 가서 13개월 동안 로마 사랑에 빠지고 만다. 로마 도착 전 여행지는 로마를 사랑하기 위한 연습게임이었던 것. 


자료를 보니 2006년에 찍은 사진인데 그 당시엔 프란체스코 기마상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길은 좁지만 차가 작아지면 2대가 지나가고도 남을 정도로 길이 넓어진다.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지 얼마나 넓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길을 받아들이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모르 파티 (Amor Fati).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토로네(Torrone) 가게가 보인다. 젤라토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꼭 오리지널 레시피로 먹어봐야 하는 아이템 중의 하나. 너트와 누가(Nougat)로 만든 이탈리안 토로네. 티라미수(Tiramisu)는 Tirare(들어 올리다) + mi(나를) + su(위로)의 합성어로 나를 들어 올린다는 의미로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달달함과 동시에 입안을 가득 채워주는 마스카포네 치즈향이 에스프레소와 함께하니 천상의 궁합. 그런 티라미수가 토로네의 너트와 누가를 만났으니 극한의 풍미.

창가 화분에 심어놓은 것이 타바스코 페퍼를 닮았다. 잘 익은 놈들이 때깔도 곱다. 

건물 벽면엔 어미새가 새끼들한테 둥지에서 먹이를 주는 모습의 주철 장식 조각을 붙여놓고 그 위엔 새들이 앉을 수 없도록 철심을 박아 놓았다. 깔끔한 마을과 새들의 배설물은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이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차도 없고 인적도 드문 풍경. 본연(本然)의 모습이지만 인파로 인해 늘 가려져 있다.

그저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마을의 공식 출입구 성문. 이 문을 나서면 마을을 벗어난다.

성문을 나서니 움브리아 평야가 한 눈 가득이다. 

힐링 마을 아씨시. 잘 쉬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이태리의 마지막 일정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로 출발. 

이번 여행 마지막 일정은 저녁노을 가득한 로마를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것. 원래는 자니콜로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으나 해 떨어지고 도착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 싶어 테르미니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바로 언덕까지 직진. 다행히도 아직 해가 서산에 붙어 있다. 


이탈리아 통일 영웅 가리발디 장군에게 헌정된 로마 최고의 후광.

성 베드로 성당. 저녁노을에 돔(Dome)이 필(feel)을 제대로 받으셨다. 

오후 반나절을 꼬박 돌아다녀서 둘러본 후라서 이제는 친근한 이름들.

가리발디 기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비토리아 이마누엘레 2세 기념관. 

하지만 정작 가리발디 자신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혹자는 바티칸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려면 기마상의 각도를 더 돌리거나 목을 더 돌려야 한다. �

베네치아 광장과 성 베드로 성당은 자니콜로 언덕을 중심으로 마치 일부러 그렇게 설계라도 한 듯 정확히 90도의 각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 바티칸을 바라보려면 목이 돌아갈 지경. 더구나 가리발디는 프리메이슨 회원이었기에 바티칸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다. 


프리메이슨은 사상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기존의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사상들이 섞여있어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질을 지닌다. 회원들 중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무장한 철학자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장미 십자회, 템플 기사단, 연금술 등의 신비주의 적 오컬트 사상에 심취한 학자들도 있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모차르트, 철학자 몽테스키외, 루소 등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가리발디 장군이 바라보고 있던 곳은 가족과 동지들이 모여 있는 바로 여기. 가장 가까이 있는 흉상은 가리발디의 손자 브루노 가리발디. 함께 싸우다 사망한 첫 번째 부인 아니타를 포함하여 통일 전쟁을 함께 치른 전우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 

지중해 바다의 적당한 수온과 충만한 습기로 로마는 매일 저녁 달아오른다. 뜬금없이 아프리카 사바나의 저녁노을이 궁금하다. ^^

어느 행성의 우주인이 타고 온 듯한 판테온 지붕에는 어느새 언덕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그 옆으로 첨탑 부위에 바벨탑의 흔적을 살포시 간직한 보로미니의 사피엔자 성당 돔이 발사대에 대기 중인 로켓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다.

역시 콜로세움은 노을로 채워야 맛이다. 황금시간대에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 붉게 물든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는 관광객들.

해가 지니 트레스테베레 만남의 광장으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고

젊음의 시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로마를 마지막으로 짧지 않은 열흘의 시간 동안 애들 엄마와 단 둘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무리한다. 알찬 여행이었고 보람찬 시간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그래서 감사하다.  


다음 여행 목적지는 스페인.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의 패권 싸움에서 승리한 스페인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분리한 후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한다. 이야기가 넘쳐나는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은 언제나 가슴 뛰는 정답. 고대 로마 이전의 문명은 박물관에서 보는 것으로 대신하면 충분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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