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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Feb 21. 2023

회의도 발표도 즉흥 연주처럼♪

부서장이 되고 달라진 점 - 4편 [회의/발표]

회사에서 부문 리더가 되었습니다. 부문은 여러 팀을 묶은 상위 조직입니다. 부문 리더가 되니 팀 리더일 때와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부문 리더는 처음이라 생소하지만, 새로운 역할 경험을 통해 배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앞으로 틈틈이 부문 리더 역할을 하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4번째 순서로 회의/발표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자기 사람을 직접 데려올 수 있어야 한다. (링크)
2) 담대하게 외쳐라 "책임질 테니 진행해!" (링크)
3) 연봉 면담, 잘할 수 있을까? (링크)
4) 회의도 발표도 즉흥 연주처럼♪
4) 회의도 발표도 즉흥 연주처럼♪


육아일기를 쓰며 얻은 인생 교훈 한 가지.

"사람 성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한울이가 갓난아기 때 발가락을 빨려고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가면서 올렸었다.

그러다가 왼발이 먼저 손에 잡혔다.

그 뒤로 한울이는 왼발만 빨았다.

한울이가 먼저 잡은 발이 오른발이었다면

아마 오른발을 한동안 빨았을 것이다.

내가 가진 성향도 이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아주 작은 우연한 경험이 굳어진 것일 뿐.

나는 얼마든지 다른 성향을 가질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연구자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 조용히 오래 탐구하기를 즐겼다.

무언가에 내 눈길을 끌면 궁금증이 생겼고

A부터 Z까지 전부를 알고 싶어 했다.

전부를 알기 전에는 결론을 내지 않았다.

결론을 내려면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주제 하나 잡아서 마음껏 연구하는 대학원은

이런 성향을 가진 내게 낙원과도 같았다.

원래는 박사 유학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연구자는 필요 없었다.

조직 이슈와 관심사가 시시각각 변했다.

보고 대상과 경영진의 문제의식이 바뀌면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가 시의성을 잃었다.

그건 내가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의미였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시의성이 중요했다.

원하는 결과물 수준을 만들기 위해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시의적절한 타이밍과 기대 수준에 맞춰서

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연구자 성향을 완전 버리진 못했다.

변화하는 이슈에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려면

여러 경우를 고려해 미리 대비해야 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고

앞으로 벌어질 일도 시간을 내서 준비했다.

모든 경우를 완벽히 대비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량이 상당히 많아졌다.


고생은 했지만 그만한 보람은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준비된 인재로 인정받았다.

이전 직장에서의 사례 하나를 들어보면,

고객사 대표가 새로 취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대표의 관심 주제를 미리 파악해 두었다.

그중에 지속가능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조직 내 지속가능성이

핵심 이슈로 부상할 것임을 예상했다.

그때 맡고 있던 업무는 충실히 하면서

따로 지속가능성 이슈와 대안을 정리했다.

얼마 후 고객사와 대표 간 미팅이 잡혔다.

예상대로 지속가능성이 어젠다에 있었다.

조직 내 지속가능성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리더들 포함 조직 전체가 우왕좌왕했다.

그제야 미리 공부해 둔 내용을 공유했고,

그 바탕으로 논의 방향성을 잡아 대응했다.

덕분에 아주 크게 칭찬을 받았다.

'조직 이슈를 예상하고 철저하게 준비한다'

한동안 내 업무방식이 되었다.




부서장이 된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눈앞에 이슈 해결만 겨우겨우 해내고 있다.

예상되는 이슈는 셀 수도 없이 많아졌고

대비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나름 대비해도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잘못 준비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작년 스위스 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러 국제기구와 미팅에 참여했다.

발표는 동행한 동료와 CEO가 맡았다.

나는 공공사업 이해를 위해 참관을 했다.

현지 출장 중 미팅 예정 기관 한 곳에서

자궁경부암 제품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동료가 준비한 발표자료는 말라리아였다.

내가 급히 내용을 준비해 발표하기로 했다.

이 상황은 발생할 일이라 예상은 했었다.


나름 잘해보려고 스크립트를 쓰고 외웠다.

그런데 발표를 할수록 분위기가 이상했다.

장표 순서대로 내용을 설명하는데

관계자는 내용과 상관없는 질문을 던졌다.

답변을 하면서도 발표는 계속 이어갔다.

옆에 있던 CEO가 '넘어 가자'며 눈짓했다.

스크립트는 잊고 핵심만 짚으며 넘어갔다.

돌이켜 보니 내가 잡은 발표의 포인트와

기관에서 기대한 논의 포인트가 달랐다.

나는 제품의 기술적 원리를 설명했는데,

기관 관계자들은 제품이 저소득국 환경에서

어느 정도까지 사용가능한지 궁금해했다.

발표를 급히 준비하느라 정작 해당 기관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어로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스크립트를 벗어나기가 무척 두려웠다.


발표가 끝나고 CEO가 논의를 이끌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며

내 발표 동안 어긋나 있던 논의 주제를

해당 기관의 관심 주제로 되돌렸다.

그러면서도 회사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들을 적절히 잘 드러냈다.

그 모습에서 임기응변의 내공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실패하고 좌절했던 경험이었다.

동시에 동료를 신뢰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리더는 임기응변에 익숙해져야 한다.'

경영진 면담에서 들었던 조언 중 하나였다.

경영진이 보기에 나는 100% 실력 발휘에

120% 준비하는 사람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나도 동의했다.)

그런 방식이 실무자 때는 가능하다고 했다.

리더가 되면 다루는 이슈는 많아지고

준비 시간은 훨부족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준비는 30%만 하고

임기응변을 70%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회의나 발표할 때도 준비된 스크립트보다는

청중의 호흡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마치 즉흥 연주에 빠진 연주자처럼.


임기응변 또한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이라면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 보고자 한다.

임기응변에 능한 CEO도 가까이 있으니

회의에 같이 참석하며 관찰하고 배워야겠다.

그리고 가벼운 회의나 발표는 의도적으로

준비를 좀 덜 한 채로 참여해 봐야겠다.

이전 방식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유연하게 상황 대처하는 법에 익숙해져야겠다.


임기응변은 무대 위 막춤처럼 부담이 된다.

내가 가졌던 성향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렇지만 육아일기를 쓰며 깨달았듯이

성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도 익숙한 예전의 모습을 내려놓고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가려고 한다.

이걸 해내면 나는 또 성장할 수 있겠지.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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