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국수 강연 2016/7/14
회사의 조찬세미나에 조훈현 국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해주셨다. 바둑에서 복기가 중요하듯 강연 내용 자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시간 앉아서 조훈현 국수의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고, 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정리해 보는 것이다. 이 정리한 내용이 곧 내가 앉아 있었던 한 시간의 가치로 내 인생에 남게 되겠다.
바둑은 승부의 룰이 명확한 게임이다. 정해진 룰 안에서 상대방과 한 수 한 수 겨루며, 정해진 승부를 하는 일종의 스포츠다. 조훈현 국수의 강연은 바둑판에서 어떻게 자신이 성장해 왔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사회에서의 삶은 바둑과는 달리 룰 자체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둘이 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점, 경쟁자들끼리 공평하지 않다는 점 등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한 분야에서 최고 정점에 오른 조훈현 국수의 성장과정은 내가 삶 속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훈현 국수는 만 4살 때부터 시작해서 만 9살? 때 바둑프로기사로 입문했다고 한다. 바둑 실력이 급격히 늘었던 계기를 몇 가지 설명하였는데, 어느 분야에서도 기본적인 실력향상을 위한 단계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첫 번째는 룰에 익숙해지는 단계다. 조훈현 국수는 4살 때부터 아버지가 바둑두시는 걸 지켜보고, 기원에 따라다니면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바둑을 두었다는 표현보다 바둑돌을 나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 세력을 만들고, 세력을 연결시키면 더 세력이 공고해진다는 개념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아버지하고 바둑둘 때는 일렬로 돌을 주욱 놓았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기본적인 게임의 룰과 승리의 개념을 파악하면서 그야말로 익숙해지는 단계다. 이 단계는 어떤 분야에 대해서 '그거 조금 알아~' 라고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신입사원인 나로서는 이제야 기본적인 사업과 시장, 산업에 대해서 익숙해지고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정형화된 패턴을 익히는 단계다. 조훈현 국수는 10살 때 무렵 프로기사가 되고, 일본으로 바둑을 사사받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때 배웠던 내용이 정석과 포석같은 교과서적인 대응 방법들이었다. 상대방이 A로 나오면 B로 대응하고, C로 나오면 D로 대응하라. 라는 일종의 이론들의 모음집인 것이다. 조훈현 국수는 이 이론들 모음을 처음으로 정식으로 배우면서 모든 정석과 포석의 그림을 머리속에 담아두고 바둑에 임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교과서나 개론서를 충실히 공부하고 그에 맞게 대답을 잘 써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론 공부의 중요성이 나타나는 부분 역시 조훈현 국수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이론 체계가 갖춰지기 전 조훈현 국수는 본인이 마주했던 경험과 사례들을 바탕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한 수 한 수를 대응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조훈현 국수가 두는 바둑은 강찬 분위기와 몰아붙이는 힘은 있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져 역전패를 당하곤 했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건데 선택지의 폭이 넓고 한 수 한 수가 승부를 가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즉흥적이거나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갈 때 오히려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그러나 상황이 전개되고 한 번의 선택으로 승부가 결정나는 순간에서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제약이 있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생각이 한 순간에 꼬여버릴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서 복잡한 상황을 체계를 가지고 고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게 바로 이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조훈현 국수도 바둑의 기본적인 이론체계를 익히고 나서는 상황을 보고 자신의 머리 속으로 기억하고 있는 정석 중에서 가장 적절한 수를 생각해 내서 대응했다고 한다. 이론을 적절히 활용하게 되었을 때 본인의 바둑 실력이 크게 향상된 것을 느꼈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파격을 통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단계다. 정석과 이론을 익힌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을 할 때, 한 판은 이겨도 두 판을 연속으로 이기기 어렵다. 이론에 정통한 사람들은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다 알고 있을 뿐더러 대응방식도 비슷하기 때문에 실력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이 사람들끼리 승부를 가르는 요인은 보통 실수를 적게 하거나, 누가 더 성실하게 이론을 더 잘 공부했느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두 번째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들은 두 번째 단계에서 더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조훈현 국수도 어느 정도 성장해서 강자들과 붙게 되었을 때 연승을 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서로 이론에는 정통했으나 그 큰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훈현 국수는 오히려 지금까지 알아왔던 바둑 이론들을 모두 머리 속에서 지우는 연습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구축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다. 일본에서 바둑 유학을 하던 시절 1주일에 한 번씩 바둑 스터디를 한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바둑을 지도해 준 사형은 자신이 지도해준 대로 두지 않으면 수시로 대나무채로 때리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이때 동기생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한 그룹은 매를 덜 맞은 그룹이고, 다른 한 그룹을 매를 계속 많이 맞은 그룹이다.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조훈현 국수는 매를 계속 맞은 그룹에 있었다. 조훈현 국수는 바둑을 가르치는 사형이라도 지도해준 내용을 납득할 수 없으면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 대로 두었다고 한다. 본인이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내용은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저 지도해준 대로 따라서 두는 건 자기 진짜 실력 향상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매를 덜 맞는 그룹은 사형이 지도해준 대로 잘 따라했기 때문에 매를 덜 맞은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매를 덜 맞았던 그룹은 바둑계에서 크게 되지 못했지만, 매를 계속 많이 맞았던 그룹은 다들 바둑계에서 이름을 날릴 만큼 고수로 성장해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부터는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다. 대학원 시절 구글 스칼라에서 논문을 종종 검색하였는데, 구글 스칼라에 적힌 문구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보라' 였다. 해당 문구를 볼 때마다 이미 구축된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가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파격'이 필요하다. 이 시기는 격식을 깨드리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관점을 형성하고 세상과 승부를 다시 바라보는 시기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생님과 부모님 등 어른들의 말씀, 진리라고 여겨졌던 사회의 질서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해 보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건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했을 때, '쟤는 왜 저래?' 라는 시선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본인이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변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이론을 형성할 수 있고, 내 스스로의 생각을 주장하는 데에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를 이끌어주는 조력자가 있다면 그건 선생님일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 성실하게 배우면 두 번째 단계까지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이름 있는 대학교, 이름 있는 교수를 찾아 목숨거는 사람들은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이론을 좀 더 쉽게 배우겠다는 생각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회사에서는 상사의 말에 복종하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문화라는 이유로 조직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 같다. 이건 좀 여담이지만,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똑같이 '열심히 많이 배우겠습니다'라고 자신의 각오를 보여준다. 그건 본인 스스로 조직에 도움이 별로 안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기업이나 우리 사회에서나 지금 있는 그대로를 열심히 배우고 똑같이 이행하려는 사람은 발전에 도움이 별로 안된다. 나는 우리의 배움과 성장, 고수 혹은 사회의 전문가가 되는 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인격지식체로 한 사람의 독보적인 존재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해 가는 세 번째 단계에서 조력자가 있다면 바로 동료들일 것이다. 조훈현 국수에게 이창호 국수는 비록 제자지만, 이창호 국수가 성장한 뒤로는 서로 동료로서 비판과 경쟁을 통해 함께 성장해 나가는 관계가 되었다. 이 정도 수준에서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지 못한다. 다만, 서로가 가진 이론체계와 관점을 경쟁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하고, 다시 경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단계이다. 이 과정에서 바둑의 '복기'가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긴 사람은 다음에 더 좋은 수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진 사람은 다음 번에 지지 않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바둑의 '복기'가 인생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윤태호 작가의 <미생>을 본 사람이라면 공감을 할 것이다. 내가 과거의 나와 마주앉아서 나의 행동과 생각과 그로 인한 결과를 되돌아 보는 시간, 그리고 미래의 더 나은 나의 행동과 결과를 위해 고민하는 성찰의 시간이 복기인 것이다. 내가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 번째 단계로의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시작 단계는 지금까지 배웠던 이론에 대해 나의 관점에서 비판해 보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나의 관점이란 게 형성될 수 없다. 설령 나의 관점이 이미 형성되어 있어도,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관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복기'라는 바둑의 특수한 행위는 개개인의 성장에는 꼭 필요한 과정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성장 스토리를 듣는 것은 참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나 역시도 나의 성장을 위해 매순간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궁금해진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도 나 자신만의 관점과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게 설령 대단한 생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나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생각과 관점을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이런 생각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약점을 돌아보게 해줄 수 있는 동료들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고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국수가 그러했듯이, 혹은 우리 사회의 정의 문제를 두고 존 롤즈와 로버트 노직이 그러했듯이, 시장경제 문제를 두고 케인즈와 하이에크가 그러했듯이 이런 경쟁적 관계에 있으면서 나와는 다른 관점을 가진 동료들이 내 주변에 있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성장의 문턱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선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의 룰에 익숙해져 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물 흐르듯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서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한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사회의 룰과 승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회의 룰과 성공에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을 학습하는 것이다. 본인의 경험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례에 의존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성공방식을 정의하는 건, 자칫 편협해질 수 있다. 가능한 다양한 이론체계들을 접해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사회의 룰과 성공방식을 재설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고 토론하라. 내가 가진 관점과 다른 관점으로 보는 사람과 얘기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내 약점을 더 잘 봐줄테니. 그렇게 정답없는 과정을 거쳐 자신을 성장시키면서 스스로 인생을 증명하면 된다.
어차피 인생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는 곳에 도달해서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이거야! 라고 외칠 수 있어야 비로소 내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