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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 변호사 Jan 22. 2021

아버지에 대하여

어느 소년의 사건기록

내가 철밥통과 같던 로펌을 나와서 호기롭게 내 사무실을 열고 얼마 후였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혈기왕성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객기를 부리면서 개업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던 때였다. 정말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책도 보고 심지어 업무시간에 운동도 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몇 개 회사 자문까지 하는 덕에 사무실 수입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던 때였다. 그런 평화도 오래 가진 못했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금에 비해 호시절이었다.


나는 그 날 특별히 나에게 주는 선물로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일간지를 보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비서가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일부러 아무런 약속을 잡지 않았던 나도, 일부러 내 일정을 비웠던 비서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한동안 로비에서 쭈뼛쭈뼛하더니, 내 사무실에서 와서도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아들이 오토바이를 훔쳐서 도망가다가 슈퍼 앞에 있는 물건들을 들이받아서 손해를 입혔다는 내용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개인 사건들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바로 그 말을 후회하고 말았다. 슬픔과 간절함이 가득한 아버지의 눈이었다.


몇 마디 더 해주고 보낼 요량으로, ‘광고도 안 하는데 우리 사무실은 어떻게 알고 오셨냐’부터 ‘아들하고 사이는 좋으시냐’ 같은 내가 떨 수 있는 친절의 오지랖은 다 떨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아내와 고부갈등으로 이혼했고 아들은 아내와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아내를 더 고생시킬 수 없어서 이혼에 동의했다고 한다. 아들은 그 이후 점점 빗나가고 있다고도 했다. 자기가 지금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나도 발을 빼기가 곤란해졌다. 내가 처리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위로하는 순간,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돌아가고 난 뒤, 비서는 남의 속도 모르고 이런 사건도 하시기로 했냐고 되묻는다.


며칠 후 내 사무실로 아이와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곱게만 생긴데 반해, 아이는 특유의 반항기가 가득했다. 쉽지 않겠구나, 험난한 사건이 되겠구나 싶었다. 역시나 아이는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많은 대화의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그 이후로 아이만 사무실로 자주 불렀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처음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 침묵마저 들어 보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경찰서를 오가면서 문득 그동안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냐?”라고 물었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건이 탐이 나서 그랬던 것이 아니란다. 이렇게 하면 아빠가 자기에게 찾아올 것 같아서 그랬단다. 아이는 아빠의 관심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오랜 침묵 뒤에 나는 그 남자가 찾아왔던 날을 이야기해줬다.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남자가 슈퍼 주인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는 사실을 알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는 아빠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수사관은 선처가 어렵다고 한다. 몇 번을 찾아가 인간적인 설득을 했다. 나는 사실 일할 때만큼은 인간적이란 평을 받지 못한다. 내 천성에도 없는 짓을 했다. 수사관도 나처럼 질긴 사람은 처음 봤단다. 이제 그만 오라고 하며 선처해주겠다고 한다. 정말 다행이다. 처벌이라도 되면 내가 그 남자의 슬픈 눈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너무 자신이 없었다.


전화로 굳이 사양했는데, 남자는 그 나름의 선물을 들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허리가 꼬부라질 정도다. 나는 천성이 못된 데다 낯간지러운 일을 싫어해서 이런 감사 인사가 너무 부담스럽다. 대충 얘기해서 돌려보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한 해가 지난 후 아이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해인사 겸 다시 감사인사였다. 그 남자가 지난해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했다. 처음 올 때부터 안색이 안 좋긴 했는데, 심각한 병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아빠의 사랑을 확인시켜줘서 고맙다 했다. 나도 모르게 아빠의 마지막 선물을 전한 셈이다. 아이는 자신이 성인이 되면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한단다. 내가 그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내 직업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다. 나는 변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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