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내가 유별나게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의 선의는 철저하게 내 자신을 위한 발버둥에 불과하다. 나는 단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더 나한테 이롭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뿐이다.
선하게 사는 것은 내 마음과 사회적인 인식을 좋게 만들며 스트레스에서도 전보다 더 유연해질 수 있다. 내가 남긴 선행이라는 발자국은 그만큼의 내 마음의 여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선한 마음은 그냥 나의 행복만을 좇기 위한 위선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사실 내 행복을 위한 소망이라면 그 마음은 ‘선’인가?
하지만, 인간 중에 이 위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애초에 어디까지가 ‘선‘이고 ’악‘인지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선행을 많이 남긴 인물이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더라면, 어떤 채식주의자나 동물들에게는 그 평범한 식사가 ‘악’으로 다가왔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의 범위만 지켰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은 너무 애매모호하며 사람마다 그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애초에 완전한 ‘선’은 존재할 수도 없다. 종교도 어떤 신이든 자기 신자에게만 축복을 베풀기 마련인데, 어떻게 인간이 이 세상 모든 것에 선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기부는 좋은 일이지만, 기부를 했다고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들은 그냥 그 사람이 남긴 발자국들에 불과하다. ‘선’ 뿐만 아니라 ‘악’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단지, 대부분의 큰 발자국을 선행으로 남기려는 각자의 노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도 사실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선’과 ‘악’의 범위와 기준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이라는 것은 실제로 선해서 ‘선’이 아니라 선하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점점 사회가 개인주의로 변화하는 요즘, 그 ‘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나는 가끔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