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과 휴리스틱
나는 매일 아들을 학교에 등교시킨다. 학교와 직장, 그리고 집이 가까운 덕분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글을 조금 쓰다가, 잠시 시간을 내어 아들과 함께 학교로 향한다. 아침 운동도 되고, 아들과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다.
손을 잡고 걷는 아침은 참 좋다. 바람이 살짝 차가운 날에도, 햇살이 따스한 날에도 이 시간만큼은 느긋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들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트랄랄레로 트랄랄라.... 퉁퉁퉁퉁퉁퉁퉁퉁퉁 사우르
나는 밈을 꽤 잘 아는 편이다. 아이들 경제교육을 위한 만화책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신 밈을 꾸준히 확인하는 건 내 일의 연장이자,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침에 중얼거릴 때도 금방 눈치챘다.
“이탈리안 브레인롯... 뇌절된다. 그러다..ㅎㅎ”
아들은 내 반응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탈리안 브레인롯의 캐릭터들이 누구누구가 싸우면 이기는지 계속 얘기한다.
“퉁퉁퉁사우르가 세계관 최강자인데... 리릴리 라릴라가 시간 돌리기 기술을 써서 어쩌고 저쩌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며칠 째 아들이 얘기하는 이탈리안 브레인롯. 아마도 이것도 한 달이 지나면 또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바로 두 달 전에는 ‘칠가이’가 유행이지 않았던가? 당분간 계속 퉁퉁퉁사우르, 브르르브르르 파타핌, 카푸치노아사시노를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밈... 참...
밈(Meme)은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아이디어, 행동, 혹은 문화적 요소가 사람들 사이에서 모방과 학습을 통해 퍼져 나가는 현상을 뜻한다. 쉽게 말해, 밈은 문화적 유전자인 셈이다.
오늘날의 밈은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단순한 문화적 표현을 넘어, 짧고 강렬한 메시지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노래, 영상, 유머, 혹은 특정한 행동이 밈으로 자리 잡으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함께 즐긴다.
아침에 아들이 얘기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은 밈으로 대화하고 놀이한다. 그 안에는 재미와 공감뿐 아니라 집단 속에서 소속감을 확인하려는 심리가 담겨 있다. 물론 우리 세대도 유행은 있었다. 하지만 요즘 밈은 전파 속도가 훨씬 빠르고 종류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밈이 단순히 유행어와 놀이에 그치지 않고, 소비와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하나의 문장이 밈으로 탄생하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그중에서도 “고기가 이븐하게 익지 않았어요”라는 표현은 단순한 심사평에서 시작해 강력한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 문장은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심사위원 안성재가 한 발언에서 유래했다. 그는 스테이크를 평가하며 “고기가 이븐하게 익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는 곧 참가자의 탈락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단순한 요리 비평으로만 들렸던 이 문장이 왜 밈이 되었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븐하게”라는 표현의 독특함이다. 요리사들 사이에서는 even이라는 단어가 흔히 사용된다. “고르게 익었다”는 뜻인데, 전문 용어가 주는 생소함과 심사위원의 진지한 태도가 결합해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남았다. 둘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이븐하게”라는 표현이 단순한 요리 용어를 넘어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며 패러디의 폭을 넓힌 것이다.
이 밈은 빠르게 일상 속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오늘 자료가 이븐하게 정리되지 않았네요”라며 직장인이 서류를 탓하거나, “시험공부가 이븐하게 안 됐어”라며 학생들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하나의 밈이 현실의 다양한 맥락에 녹아들어 유머와 공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밈이 소비 시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램 방영 직후,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주방 도구 판매량이 급증했다. 칼, 프라이팬 세트, 심지어 조리용 강판까지 거래액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보고 “밈이 소비 심리를 자극해 시장 트렌드까지 움직이는 현상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밈은 “묵찌빠”다. 이는 오페라 리타의 한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두 남자 배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묵찌빠 게임을 벌이는 장면은 원래는 극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그러나 배우들의 무거운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이 사람들에게는 코믹하게 다가왔다.
이 장면은 온라인에서 주목받으며 “난 대학 시절 묵찌빠를 전공했단 사실” 같은 문장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이 형식은 다양한 유머로 재창조되었다. 예를 들어,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난 대학 시절 프라이팬을 전공했단 사실,”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은 “난 대학 시절 집중력을 전공했단 사실”이라며 농담을 이어갔다.
밈은 이제 단순히 인터넷상의 유행을 넘어, 사회적 행동과 경제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문화적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고기가 이븐하게 익지 않았어요”와 “묵찌빠”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우리 삶에 유머를 더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특정 트렌드를 어떻게 소비로 연결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통로가 되었다.
(이 글을 쓴 것은 작년 말이었다... 책을 내기로 했다가 어긋나는 바람에... 그냥 내용을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가버린 밈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불가 6 개월 전의 밈도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밈은 단순히 재미있고 유쾌한 유행어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밈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과정에는 사람들이 복잡한 상황을 간단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본능이 담겨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이를 ‘휴리스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휴리스틱이란 사람들이 복잡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지름길이다.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도록 돕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했을 때 “고기가 균일하게 익었는가?”를 판단하려면 굽기 정도, 열 분포, 조리 시간 등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이븐하게 익었는가?”라는 단순한 기준을 사용하면 판단이 훨씬 빨라진다.
휴리스틱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 “가장 익숙한 브랜드를 선택하자”는 판단 기준이 휴리스틱이다. 익숙한 브랜드를 선택하면 우리는 모든 상품의 품질과 가격을 비교하지 않고도 빠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복잡한 메뉴판을 보고 “가장 눈에 띄는 음식을 주문하자”라고 판단하는 것도 휴리스틱이다.
휴리스틱의 장점은 판단과 선택을 빠르게 해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보가 지나치게 단순화되면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제품이니까 좋을 거야”라는 판단은 시간이 절약되지만, 반드시 최고의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이것이 행동경제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감각이나 익숙함에 의존해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행동경제학에서는 ‘비합리적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비합리적 합리성’이란, 합리적으로 보이는 판단 속에서도 실제로는 간단한 정신적 지름길, 즉 휴리스틱이 작동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복잡한 상황에서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도록 도와주지만, 종종 비합리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른다고 상상해 보자. 다양한 브랜드와 맛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종종 “이 브랜드는 친숙해”라는 기준을 사용한다. 왜 그 브랜드를 선택했을까? 아마도 TV 광고에서 봤거나, 이전에 구매한 경험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브랜드의 맛과 가격을 일일이 비교하지 않고 빠르게 선택을 내리기 위해 익숙함이라는 휴리스틱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1+1 행사다. 마트에서 “1+1”이라는 커다란 문구를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건 기회야”라고 생각한다. 설령 해당 제품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하나 사면 하나 더 준다”는 단순한 메시지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래 사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물건까지 카트에 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비합리적인 소비로 이어질 수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기준에 의해 선택을 내리는 걸까? 행동경제학자들은 그 이유를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감정의 역할에서 찾는다. 인간의 뇌는 한 번에 복잡한 정보를 모두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모든 선택지를 철저히 분석하기보다는, 중요한 몇 가지 단서만을 바탕으로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익숙한 브랜드는 안전하다”는 믿음은 선택 과정을 단순화해 준다.
또한, 우리의 선택은 논리뿐 아니라 감정에도 크게 좌우된다. 1+1 행사를 볼 때 느껴지는 ‘득템’의 감정, 친숙한 브랜드를 선택할 때의 안정감은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이런 요인들은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복잡한 세상에서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비합리적 선택이 항상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휴리스틱은 우리의 삶을 간단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준다. 복잡한 메뉴판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가장 눈에 띄는 음식을 주문하거나,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브랜드를 선택하는 것은 실제로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준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에서는 휴리스틱이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매하거나 집을 선택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비싸니까 최고일 거야” 같은 단순한 기준이 잘못된 결정을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은 완벽히 이성적이지 않다. 우리의 선택은 때로 비합리적이다. 행동경제학은 이를 단순히 문제로 보지 않는다. 이 학문은 비합리적 선택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선택을 할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비합리적 합리성”은 단순히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단서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일상적인 소비에서부터 중요한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와 아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밈은 우리의 선택에 은근히 영향을 미친다. 선택은 때로 복잡하고 어렵지만, 밈은 이를 단순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침에 흥얼거린 밈 한 구절이든, 재미있게 따라 한 행동이든,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가볍고 쉽게 만들어주는 순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과 행동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