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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Jun 19. 2016

마음은 원래 셀 수가 없다

무심코 한 말을 무심히 넘기지 않는 

"저게 뭐야. 왜 휴지걸이가 하늘 꼭대기에 있어."


집에 놀러 온 이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 집주인이 달아놓은 휴지걸이는 그냥 두고 샤워기 높이쯤 되는 타일 벽에 휴지걸이를 하나 더 달았더랬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데, 굳이 이유를 대자면 휴지를 쓸 때마다 스테인리스 덮개가 탈탈탈탈 거리는 소리가 귀에 좀 거슬렸달까. 그리고 어차피 두루마리 휴지는 아래로 당겨 풀어쓰는 거니까 좀 높게 다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조금 전 샤워를 하다가 알게 됐다. 한동안 세탁기 위에 나뒹굴던 휴지걸이가 다시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타일 벽에 붙어있던 휴지걸이가 떨어진 게 한 달쯤 전이었나. 이사를 와서 저 높이에 달아놓은 지 반 년만이었다. 몇 번 다시 붙이려 시도해봤지만 몇 초 견디다 이내 떨어졌다. 고장이 났나 보다 하고는 세탁기 위에 올려뒀다. 딱히 어디 깨진 데가 없으니 버리기도 좀 그렇고. 나중에 다시 한 번 해보지 뭐. 그런. 고장 난 거 아니었구나. 흐흐. 좋다.



욕실. 두 개의 휴지걸이




매번 이렇게 우렁각시처럼 다녀가는 이.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여간해선 그러질 않는다. 무심코 집이 오래돼서 그런지 화장실에서 하수구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다음에 고무 재질의 하수구 덮개를 가져온 이기도 하다.


마음은 원래 셀 수가 없다. 때문에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몇 번이라는 횟수, 얼마라는 금액으로 재고 싶지도, 그럴 수도 없다. 그런 그녀는 최근 눈에 띄게 볼록해진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참치로 태어날 걸 그랬어." 우스갯소리를 할 뿐이다. 자기 배가 참치 뱃살보다 먹음직스럽다며 튜나 킴, 마구로 상. 스스로 새 별명까지 쏟아낸다. 재밌다고 깔깔깔깔. 땀 흘리게 웃고 난 다음에 느낄 수 있는 그 상쾌한 공기가 좋다.



커피그라퍼 coffeegrapher - 사진작가의 카페 시벳 cafe civet


 


후텁지근한 오늘 날씨. 물을 아무리 마셔도 시원한 냉커피를 한 잔 들이켜야 갈증이 풀릴 것 같다. 커피 입맛이 까다로운 그녀는 우리 동네 카페에 자기 나름의 등수를 매겨놓고 있는데 오늘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진작가의 카페 시벳'이 좋겠다.  


커피를 앞에 두고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꽤 요란하게 카페에 들어선다. 맥고모자를 쓰고 볼로타이(bolotie)를 맨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시다'시피 저자세로 일관하는 아주머니 한 분. 한껏 멋을 낸 치장도 그러하지만 할아버지의 그 거칠 것 없는 목청은 재산이 꽤 있는 동네 유지일 거란 추측을 하게 만든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몰랐다. 설마 그게 주문을 받으라는 신호일 줄이야. 


"아, 여기 사람이 온 지 얼마나 됐는데 주문을 받아야지. 뭐 있노? 나는 칡차."

"......................................................................................................"


웃으면 안 돼. 참아야 해. 물론 웃었더라도 할아버지는 우리 따위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웃음을 참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첫 번째 '어이'부터 웃음을 참았다고 했다. 다방커피도 없고, 칡차도 없고, 주문은 카운터에 가서 해야 하며, 계산은 선불인 카페에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그럼 아가씨 맘대로 줘" 그리곤 다시 목청을 높여 이야기를 이어가는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보며 우리는 갑자기 칡차가 마시고 싶어졌고, 그 덕에 다시 깔깔깔깔.


그러고 보니 옆 테이블에 앉았던 학생 둘이 카페 와이파이 비밀번호 때문에 영수증이 있네 없네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내 앞에 버젓이 펼쳐져 있던 영수증을 눈짓으로 가리켰던 그녀다. 영수증을 건네고 인사를 받은 건 나지만 사실은 그녀가 한 일이다. 무심한 듯 누구보다 세심한.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 그녀. 내눈엔 그저 예뻐. 주름이 자글자글해져도 예쁘기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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