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앗이 육아로 나는 3등 엄마가 되었다.
내가 시골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친정 부모님 댁을 기점으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세 딸이 오밀조밀하게 살았다. 이기적 이게도 나는 내 아이를 마음 편하게 맡기려는 욕심 때문에 이직까지 하면서 엄마 옆에 붙어 있었다.
집에서는 밥도 안 해 먹던 나는 저녁 일정이 없는 날은 평일에도 엄마 집에서 끼니를 해결했고, 주말의 최소 두 끼는 우리 식구 셋, 언니네 식구 넷, 대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함께 했으니 친정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요즘 줄임말로 ‘할말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이다.
직장생활이 힘들다는 핑계로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의 수고를 장을 보거나, 때때로 브랜드 옷을 사드리거나, 매달 얼마의 용돈을 드리는 등 돈으로만 해결하려 하였다. 엄마 미안해!
아이는 뱃속에서 거꾸로 뒤집어 있던 탓에 제왕절개로 2.65 킬로그램에 태어났다. 태어난 처음 며칠은 아이가 엄마 젖을 잘 빨리 못하여 1~2백 그램 정도 무게가 빠진다는데, 3 킬로그램 대의 아이와 2.65 킬로그램의 아이의 1~2백 그램은 차이가 컸나 보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상황까지 오자, 모유수유 권장 병원에서 모유 수유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아이에게 혼합 수유(모유 플러스 분유)를 시작했다.
첫 조카를 엄마가 돌보게 되면서 엄마는 ‘할마’(할머니 엄마)가 되어 다시 육아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까지 왔었다. 그 탓에 내가 아이를 임신했었을 때부터 절대로 더는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엄마는 작고 작은 내 아이를 남에게 맡길 수 없었나 보다. 미리 알아둔 이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또다시 육아전쟁을 시작하셨다.
잘 먹고 빨리 키워 엄마의 수고를 덜어드렸으면 좋을 텐데, 혼합 수유를 하는 중에 유축을 무리해서인지 ‘산후풍’이 왔다. ‘산후풍’에는 고열량의 음식을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하여, 엄마는 이것저것 몸에 좋은 것들을 해 주셨는데, 이 고열량의 음식 때문에 아이 얼굴에 열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어쩔 도리 없이 내 아이는 한 달 만에 분유만 먹게 되었다.
작디작은 내 아이는 젖을 빨지 못했고, 젖병의 구멍을 크게 뚫어 뚝뚝 떨어지게 만들어 먹여도, 먹다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다. 20ml의 적은 양을 1시간 동안 아이를 깨워가며 먹여야 했으니, 팔도 허리도 남아나질 않았다. 신생아 때는 2시간에 한 번씩 먹어야 하는데, 혼합수유 기간에는 유축해서 1시간을 먹이고, 또 돌아서서 유축하고 1시간을 먹이다 보니 마치 내가 젖소가 된 기분이 들어 우울했다. 아이의 발을 꼬집어도 보고,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어도 보다가 결국 찾아낸 자세는 아이를 안고 약간 기울이듯 서서 흔들면서 먹이는 거였다. 그런 자세로 1시간씩을 먹여야 했으니, 온 가족이 그렇게 돌아가며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직장 때문에 주말에만 아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6개월 차이로 임신했던 언니는 나를 대신하여 늙은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 매일같이 엄마 집으로 퇴근하였고, 만삭의 배 위에 내 아이를 올려놓고 분유를 먹였다. 언니의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나와 달리 모유가 풍부했던 언니는 유축하여 저장해 둔 모유를 내 아이에게 먹이며 키워주었다. 잠은 데리고 자야 할 것 같아,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이직을 하여 주말에만 보는 생활은 청산했지만, 여전히 바빴던 나를 위해 엄마와 언니의 품앗이 육아는 계속되었다.
엄마와 언니의 노력으로 내 아이는 “얘가 그 작던 애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폭풍 성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아는지, 내 딸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외출하는 나는 잡지 않아도 이모의 바지자락은 잡았고, 말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왜 자기는 조카들과 달리 이모를 엄마가 아닌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조금 더 자랐을 땐, 유치원 행사 마지막에 “엄마, 사랑해요!”를 외치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외쳐 할머니를 뿌듯하게 하기도 했다.
서운했냐고? 나도 염치가 있는 사람인데, 서운하기까지 하면 되겠는가!
아이가 감정적으로는 이모에게, 생활적으로는 할머니에게 의존하면서도 나에 대해서는 주말에 봐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지만, 모두의 도움을 받아 아이가 예쁘게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것만이 그저 고마웠다. 아이의 생존 전략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3번째 엄마가 되었지만, 탈 없이 자라주기만 한다면 내가 지는 건(?) 상관없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바쁜 내 생활에 아이가 저렇게 생각하고 공동 육아를 받아들여주는 것이 고맙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 때문에 ‘나는 모성애가 없는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었지만.
꼬박 7년을 그렇게 키웠다. 내 아이의 영, 유아기의 8할은 엄마와 언니가 키웠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딸이 바르게, 건강하게 자란 것은 그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가끔은 언니나 엄마에게 서운한 날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내 일을 하면서, 내 딸을 이렇게 잘 키울 수 있었던 건, 그들 없이는 힘들었을 일이었다.
내 딸이 엄마인 나보다 더 열심히 키우느라 고생해 준 할머니와 이모의 노력을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