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박사

나를 내려놓기까지는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by 박대노

약사, 박사, 기업기술가치평가사, 기술사업화전문코디네이터, 경영능력자격시험 2급 자격증, 각양각색의 교육 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수료증…….


약국에서 환자를 대면할 자신이 없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약회사에 입사해 직접 연구하기보다는 기획과 기술 평가 업무를 주로 하였다.

이직을 할 때마다 회사에 새로 만들어지는 부서에 발령받았고, 새로운 업무에 필요한 교육 지원을 원하는 만큼 받았다.

배움의 끝엔 자격증과 수료증이 있었다.

그렇게 수집된 나의 자격증/수료증은 많은 월급과, 최연소 이사라는 타이틀과 번 아웃을 가져다주었다.


두 차례의 번 아웃으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비염, 알레르기, 대상포진 등 면역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앞으로는 직장생활을 안하리라 다짐하고 남편을 따라 시골로 이사했다.

남편은 이왕 놀기로 한 거, 하고 싶었던 취미 활동이나 실컷 하라고 했다.

우선 남편이 먼저 시작한 테니스를 배워보라고, 평생을 앉아서 살았으니 몸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테니스는 쉽지 않았다.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에 시간이 걸리는 운동이라고 했다.

잘 걷지도 않아, 다리가 퇴화할 지경이라고 울부짖던 내가 라켓에 공을 때려 맞추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레슨을 같이 배우던 지인을 통해 여성 회원들로만 이루어진 클럽에 가입했다.


그곳은 구력이 권력인 세상이었다.

그러니 이제 테니스를 시작한 나는 10~20년의 구력을 가진 나이 많은 언니들 (이모에 가깝다) 발의 때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조무래기였다.

잘 치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곳에 가서 무시당하는 것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 같은 조무래기는 받지도 않고, 웬만한 실력에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클럽에 나를 이끌어준 지인에게 미안해 그만두지도 못하고 울면서 참석했다.



아직은 완전히 나를 내려놓지 못하던 때라, 혹시라도 내가 재취업할 경우를 생각해서 뭐라도 끈을 잡고 있어야 했던 나는 온라인으로 MBA를 수강하고 있었다.

시험과 과제 제출을 핑계로 가기 싫던 클럽 모임을 빠졌다.

다음 주 클럽에 갔더니, 나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언니가 왜 안 나왔느냐고 물었다.

“공부할 게 있어서요.”

“공부? 무슨 공부?”

“그냥……. 저 온라인으로 MBA 수강하고 있었는데, 시험이랑 과제 때문에 못 나왔어요.”

내 말에 반응하는 그 언니의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네가 그런 걸 왜 들어?”


그 언니는 나를 모른다.

내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직장을 다녔으며,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공부하고 있다는 말에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의아했다.

‘나는 그런 걸 들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저렇게 얘기하지?’

그 언니는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을 수도 있다.

지난주에 내가 안 보인 게 궁금해서 관심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자존감이 바닥에 내리 꽂혀 있던 내게는 나를 무시하는 말처럼 들렸고, 그 클럽에 가입해 있던 회원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클럽에 나와서 바보처럼 웃고 있으니까 나를 무시하나? 테니스를 못 친다고 다른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나? 자기들이 하루 종일 테니스에 목매고 있으니까 나도 그냥 그런 사람 같아 보이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화가 났다.

그 사람들의 인성을 운운하며 클럽을 때려치웠다.

그 사람들에게 내 학력이나 경력은 중요하지 않은 게 맞다.

테니스를 치려고 모인 사람들이니 테니스를 잘 치는 사람이 왕인 것도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왜 난 그게 그렇게 싫었을까?

내가 테니스를 못 쳐서? 내 잘난 과거를 몰라줘서?

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정받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못 견뎠을 뿐이었다.

내가 나를 내려놓지 못해서, 사회생활에 미련이 남아 있어서, 내가 어렵게 딴 박사학위와 자격증들을 못 쓰게 될까 봐, 그런 것들을 다 버린 나를 남들이 어떻게 볼지 나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런 것들로 남들을 평가했기에, 그런 조건 없이 그냥 인간 박대노를 보인다는 게 마치 홀딱 벗겨져 집 밖으로 쫓겨난 심정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이사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를 알기에, 내가 공부하는 동안의 그 기회비용을 알기에.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딸, 머리 좋은 딸은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피아노를 가르쳐도 절대음감이라고 데려다 키워준다고 나서는 선생님이 있었다.

주산학원엘 보내 놓으니 초등 저학년 때 경기도 암산왕이 되어 학원을 공짜로 다녔다.

공부도 잘했다. 경기도 내에서 치러지는 모의고사에서 주관식인 수학 시험을 100점 맞았다.

교내 전교 2등과는 총점에서 50점 차가 났다. 경기도 4등이라고 6개월 치 문제집을 공짜로 받았다.

그래서 약국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석사, 박사과정 하겠다고 할 때도 하고 싶은 거 하라며 그냥 지원해주셨다.

좋은 곳에서 선자리가 들어와도 “우리 딸은 공부해야 해.”라며 거절하셨다.

그런 부모님께 ‘이제 다 때려치우고 시골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살래요.’라고 말씀드리기는 쉽지 않았다.

삼십 대 초반에 억에 가까운 연봉을 받을 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딸이 자연인이 되겠다니, 나라도 펄쩍 뛸 일이었다.

부모님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큰 건 사실이나, 솔직히 나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너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네 타이틀 다 버리고 자연인 박대노로 살아갈 수 있어?’

확신이 들지 않았다.

노는 게 편하지 않았다.

나만 도태되는 게 아닐까, 불안함이 이어졌다.

불안한 나를 지켜보는 건 내 아이도 쉽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 말했다.

“엄마, 엄마가 밥해 놓고 가면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 학교도 혼자 걸어갈 수 있으니까 엄마 공부하러 가.”

딸아이는 자기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나도 회사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직업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본 엄마는 매일 논문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차로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거길 혼자 걸어가고 혼자 밥 챙겨 먹을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위태로워 보였나 보다.




결국 재취업을 하기는 했다.

다시 서울로 나올 수는 없었기에,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연구원을 뽑는 회사를 알아보았다.

잘 갖춰진 시스템과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작은 회사에 와보니, 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온갖 부서의 일들이 몰려왔다.

가까운 거리라 그 회사를 선택했는데, 그 많은 부서 업무를 봐야 하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본사로 주 2~3회씩 출근해야 했다.

마흔에 회사의 최연소 이사가 되었다.

11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또 미친 듯이 일했다.

엄마에게 자기는 알아서 크겠다던 딸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고, 나도 서서히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자궁의 2/3를 드러내는 수술을 받았다.

나란 인간은 몰입을 빼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인간이고, 사회는 그 몰입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분할 수 없으니, 결국 내가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남에게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쉬웠다.

주변의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몰입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된다.

마당에 잡초가 가득하다. 잡초를 뽑는다. 끝이 없는 잡초 지옥이다.

남편이 말린다. 잡초 뽑는 일마저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냐고.

“그냥 해! 열심히 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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