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의 향상을 꿈꾸며.
지독한 내향형 인간인 내가 사회생활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외향성을 착장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내가 느끼기에도 집과 학교, 학원에서의 내 성격이 각각 다르다고 깨달았던 것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어린 나이에도 내향형 인간이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집에서는 책만 읽고, 말도 거의 안 하던 나는 남자아이들로부터 ‘우두머리’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중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자 엄마는 ‘학교 가서 말이나 제대로 하는지 걱정했는데, 학생회장씩이나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의 다중이들은 열심히 각자 필요한 곳에서 충실한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얼마나 큰지 기가 쪽쪽 빨리고 만남 전부터 긴장되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연구했던 연구자들은 나에게 영업을 해도 잘했을 거라고들 말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내가 인지한 순간부터 그렇게 다중적인 삶을 살아오다 보니, 이제는 어떤 성향이 진정한 나인지 스스로 혼란스럽기도 했다.
40여 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만들어진 외향성도 내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제2의, 제3의 나를 꺼내야 할 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다중이로 살아오는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젠가부터인지 영화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너무 황당한 이유일지 모르지만, 자막을 놓치는 게 싫어서.
어두운 배경화면 때문에 자막이 보이지 않거나, 영상을 보느라 자막을 놓치게 되는 게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다.
원체 긴장하는 일 자체가 싫어서 공포영화는 절대 보지 않고, 스릴러, 액션도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면 보지 않는다.
주인공이 잡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쫓고 쫓기는 자체가 긴장돼서.
일상에서 내가 긴장할 만한 일들은 피하기 바빴다.
중요한 자료를 서치 하고, 수십 편의 논문을 읽고 발췌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연구 기획을 하는 게 업무였던 나는 일상의 독서조차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고 싶지는 않았고, 내 지친 일상과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으면서도,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한 주에 5권씩 소설책을 읽었는데, 언젠가부터 에세이만 읽고 있었다.
책도 한 번에 몰입해서 읽는 편인데, 시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한 번에 완독 할 수 없어 스토리의 흐름이 깨지는 게 싫었다.
그러다 보니, 짧은 글 한 편, 한 편이 완성인 에세이나 단편 위주로 책을 고르게 되더라.
그렇게 편협한 독서를 해온 지 10년이 넘었다.
내가 속한 글쓰기 모임은 아이의 선생님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의 선생님을 고르는 데 있어서 선생님의 성품을 70프로 이상으로 생각하는 나는, 학습적 성과가 따라준다면 더 감사하겠지만, 나와는 성향이 너무 다른 내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어른이 함께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아이가 너무나도 친애하고 의지하는 선생님들은 묻고 따지지도 않고 믿고 맡길 수 있는 훌륭한 성품을 가지신 분들이다.
생물학도였지만 현재는 출간 준비를 하고 있는 수학 선생님, 언론계 출신의 국어 선생님, 인테리어 사업을 겸하는 미술 선생님, 그리고 약학박사이지만 수년 전부터 백수의 삶을 살아가는 나.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는 이유도 다르고, 성향은 물론 살아온 환경도 다른 우리들은 가족 구성 등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도 너무나도 달라, 우리가 모여 나누는 모든 이야기들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준다.
선생님들은 살아온 환경만큼이나 독서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인문학부터 감성 에세이까지 두루 섭렵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독서에 몰입하기도 하고, 경제서적을 열심히 읽기도 하고, 나와는 전혀 다른 독서 방식을 통해서도 그들만의 ‘메타인지’를 글에서, 대화에서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읽었던, 읽고 있는 책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았고, 그들이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 공감 능력 같은 성숙한 정서적 능력이 부러웠다.
모든 순간 상대를 배려하는 그들의 따뜻함과 포용력, 내면의 단단함을 배우고 싶었다.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성품이, 건강한 정신이 비단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 것은 아닐 테지만, 독서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들의 ‘정서적 & 사회적 메타인지’ 능력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독서를 통해 나의 ‘정서적 & 사회적 메타인지’를 확장하고 싶었다. 그들을 배워, 지금보다 더 좋은 내가 되고 싶었다.
(메타인지는 1970년대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로 '자신의 생각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서적 메타인지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들여다보고 파악하는 것을, 사회적 메타인지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나는 수학선생님이 글 쓰는 방을 만드는데 영감을 주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있다.
그 밖에도 이전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책들을 잔뜩 구매했다.
책장이 미어터지도록 새로운 책들로 채워지고 있어 미니멀리스트를 지향(만)하는 내게 부담을 주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이 어제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줄 것이라고, 오늘과는 다른 세상으로 연결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마법처럼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나의 선생님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