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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PARK Feb 14. 2017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았다 - 1

대한민국 입시 고등학교 탈출기. 

나는 항상 한국을 떠나서 더 넓은 세상을 보기를 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 여행이나 거주를 해보는 것이 꿈이였다. 주변에는 집에서 유학을 보내주거나 부모님의 직장이 해외로 발령되어서 자연스럽게 해외 경험을 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나는 부모님 원망을 하곤 했다.


유학이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외고 지원을 할때 유학반이 아닌 국내반으로 지원을 했고, 붙었다. 나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학교라는 곳에 다니게 되었기에 기대가 많았다. 단순히 교과서를 암송하는 수준의 교육이 아닌 진짜 교육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외고 첫날 수업부터 나는 엄청나게 실망을 했다. 공립 중학교에서 받은 교육과 비교해서 전혀 나은 점이 없었다. 입시, 암기 위주의 교육은 변함이 없었다. 고등학교 첫날부터 반 아이들은 자기가 목표로 하는 대학 이야기를 했다. 다들 SKY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들은 이미 입학 전부터 각오를 하고 들어온 듯했다. 


충격적이였다. 나는 사실 대학에 가는 생각조차도 안했다. 서울대던지, 무슨 대학이던지 나는 관심 조차도 없는 상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나는 단순히 배우는 것이 좋아서 공부를 했지,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 공부한 적 없다. 외고도 지원한 이유도 주변 친구들이 외고를 지원하길래 그냥 지원을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생활은 노예 생활이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셔틀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다가 10시에 일과가 끝이 나고 셔틀 버스를 타고 오면 밤 11시였다. 다음 날에는 또 다시 6시에 일어나야 한다. 제대로 8시간을 잘 수도 없다. 지금 생각해도 미친 것은 그런 스케쥴에도 몇몇 아이들은 밤 10시 이후에 학원을 갔다는 점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모든 커리큘럼이 오직 수능이라는 한 시험을 위해서 짜여져 있는 것이고, 밤 7시부터 10시까지 감옥처럼 가두어서 야자를 해야 하는지. (더 기가 막힌 것은 야자를 감독하는 선생에게 '관리비'로 돈까지 줬다는 것이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고, 한 공간에 30명이나 되는 피가 펄펄 끓는 시기의 아이들을 가두어두다니... 하지만 아이들은 '좋은 대학'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불사할 의지였다. 다들 군말 안하고, 아무런 반항 없이, 복종했다. 이런 멍텅구리같은 좇같은 시스템에 말이다.


우울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아이들을 모은 고등학교가 이런다면, 도대체 그렇게 잘났다는 SKY대학도 이럴 것이 아닌가? 내가 도대체 이 나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뭔가? 멍청한 룰에 말없이 복종하는 거?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피하기로 했다. 처음 도피 시도는 미국 고등학교 교환 학생이었다.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조사해서 상담을 받고, 테스트도 받아서 통과했다. 하지만, 테스트 통화했다고 집에 전화가 왔는데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엄마가 하필 전화를 받아버렸다. 전화를 끊고 난 엄마는 나에게 온갖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입시에 집중할 시기에 이런 멍청한 짓을 한다면서. 외국에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좋은 학교가서 교환학생을 가거나 좋은 직장을 잡아서 연수할 때 가라고. 


그래서 나는 홈스테이를 통해 아예 미국 공립 학교로 편입을 하거나 사립 학교로 (장학금을 받고) 편입하는 방법을 조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공립 학교는 그닥 마음에 드는 학교가 없었고, 사립 학교는 학비가 어마어마하고 인터네셔널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리버럴 아츠 대학에는 인터네셔널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가 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예 미국 대학 유학으로 턴을 했다. 유학에 대한 책들을 읽고, 유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가고, 엄마에게 5장의 편지를 썼다. 제발 유학 보내달라고.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고. 이런 지옥같은 학교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화만 낼 뿐이였다.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슬프고 답답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막무가내로 혼자서 유학 준비를 했다. 담임 선생님에게는 나 유학 준비하니까 수업 들을 필요 없다 하고, 오후 수업을 몽땅 뺐다. 모의고사도 당연 뺐고. 더 이상 멍청한 시험 따위를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남는 시간에는 혼자서 자유롭게 서울을 누볐다. 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보기도 했고, 카페에 가서 와플을 먹기도 했고. 그냥 그 자유를 즐겼다. 학교라는 공간에 별 이유 없이 갇혀야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고3 때는 뒤늦게 엄마의 서포트를 얻어서, 학교 오전 수업이 끝나면 엄마가 픽업하러 와서 일찍 집에 왔다. 유학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많았지만, 대외 활동을 위한 시간은 있었다. 유학을 위한 대외 활동이었지만, 그마저도 어딘가. 영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청소년 위원회에 발탁되어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고,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 발탁되어서 독일과 프랑스를 갔다오기도 했다. 뭔가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꿈많은 청소년 시기에 이런 활동을 안하면 언제 하겠는가?


그런 우열곡절 끝에, 나는 20군데 가량의 미국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고, 동부의 한 학교에서 장학금과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리하여, 2009년 9월, 나는 드디어 그토록 원했던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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