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708일
잠시 붙였던 눈을 뜬 후 원두막으로 올라가 서는 앉은뱅이 등받이 의자에 정좌하였다. 그렇게 앉으니 정승 기분이 난다. 대감인 듯 흉내 내어 소리글을 읽고 싶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는지라 그만두었다. 할 일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책을 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앉으니 천하가 내 세상이다.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 앞의 뻗어 내린 산줄기 청학등(嶝)은 내 전원의 담이 되고 형제봉과 신선대는 내 전원의 지킴이 보초가 된다. 아래 오른편 악양천 소(沼)에서는 학들이 날아오른다. 백학이지만 청학으로 보인다.
오카리나와 하모니카를 가지고 나와서는 오카리나를 먼저 손에 잡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두어 번 반복하고는 도로 놓았다. 밭의 무성한 풀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어 오카리나를 놓고서는 내려가 다시 낫을 손에 쥐었다. 낫질과 호미질을 번갈아 하고 나니 땀이 많이 줄줄 흘렀다. 장마철이어서 구름이 내내 햇빛을 가려주기는 했지만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무더위 속에서 풀 일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바로 지난주에 편이 풀 뽑다가 벌레들의 열네 방 총격으로 얼굴이 퉁퉁 붓는 비상사태가 있었다. 가까운 보건지소에 달려가 응급처치, 사태 악화를 막긴 했지만 얼굴의 후유증은 제법 오래갔었다. 땅이 무른 곳은 낫이나 호미를 대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다 뽑았다. 다 뽑고 나니 풀 속의 차나무 순들이 드러났다.
낫질을 마치고는 “내일은 일을 안 해야지, 내일은 쉬어야지, 다시 원두막 저 위 등받이 의자에 앉아 양반 놀음, 신선놀음해야지, 하모니카도 불고 글도 읽고 오카리나도 불어야지”라는 생각을 단단히 했다.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오전 내내 컨테이너 농막 안에서 반주기를 켜, 색소폰을 불었다. 반주기는, 그 가격이 내게는 고가이지만 더 비싼 물건에 비해서는 싼 가격의 물건이므로, 무겁고 크다. 그래서 자주 가지고 내려오지 못한다. 이번엔 마음먹고 가지고 내려왔다.
오후엔 다시 원두막에 올라가 앉았다.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동서남북 확 트인 이곳에서는 바람이 사방에서 분다. ‘바람’이 생각났다. 하모니카의 '바람' 말이다. 하모니카를 잘 부는 지인에게 “나도 아이들이 쓰던 하모니카를 분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내게 김용태의 ‘바람’을 들어 봤느냐고 물었었다. 아니, 난 그런 사람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더니 “그는 라이브 무대에만 서는 음악인인데 그의 연주곡 ‘바람’도 언제 한 번 들어 보라”라고 해서 알게 된 ‘바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바람’을 이젠 동영상으로 가끔 보고 듣는다.
하지만 ‘바람’은 내가 불어 보려고 엄두를 낼 곡이 전혀 아니며 악보도 없다. 알고 보니 ‘바람’은 SBS 드라마 ‘외출’의 OST였다. ‘바람’을 이해하기 위해 ‘외출’의 개요를 살펴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 이혼한 후 카페를 경영하는 여자가 있다. 그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연하의 남자는 연상의 그 여자를 사랑한다. 여자는 두고 온 딸 아들이 생각나서 연하의 남자가 주는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 마침내 사랑에 빠져들 무렵 전 남편이 아이들을 내세워 재결합을 요구한다. 고민 끝에 아이들을 위하는 길로 선택하게 된다. 그러자 연하의 남자는 미국으로 떠난다. 전 남편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결별. 어느 날 아침, 연하의 남자가 주고 간 화분을 밖으로 내다 놓으며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커피 한 잔 달라고 하면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바로 그 ‘연하의 남자’였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김영태의 하모니카 ‘바람’이었다. 하모니카로 연주되면 어떤 곡이라도 애잔하게 들리는데 김영태가 연주하는 바람은 더욱 그랬다.
매기의 추억, 과수원 길 같은 쉬운 곡들을 불고 있는데 앞에서 새들이 총총 뛰어다닌다. 벼슬을 단 저 새들의 이름을 모르겠다. 한 쌍으로 보인다. 친구일까? 내 소리 듣고 온 새는 아니다. 밭의 무엇을 쪼아 먹으러 온 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새들은 후투티였다.
집의 편에게 전화하여 나팔과 오카리나, 하모니카 불면서 놀고 있다고 전화했더니, 잘했다고 아주 잘했다고 격려한다. 집에서 여기 악양으로 출발할 때 편의 부탁은 늘, “가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하지 말고 제발 좀 놀다 오라”라는 것이다. 거짓말로라도 놀았다고 하면 잘했다고 말해 준다. 이번엔 진짜 놀고 칭찬 들었다. 그러니 이번엔 도덕적으로 떳떳한 칭찬이다. 앞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