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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Aug 13. 2023

춘자국, 이름 그것 참

070801수

도착하니 춘자국이 피어 기다리고 서 있다. 산 중턱이어서 그럴까. 늦게 핀다. 며칠 전에 들른 진주에서는 한 달 전에 피었고 부산에서 여기까지 오가는 길인 섬진강 변에서도 벌써 피어 있었는데 말이다. 


이 꽃은 이름이 특이하다. 춘자국 혹은 기생초, 이름 그것 참…. 사실 춘자국도 기생초도 이 꽃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멀다. 그 이름이 춘자국이건 기생초건 특이하다. 드러내 놓고 부르기엔 좀 민망한 이름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꽃이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때 화려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거라고 한다.


이 이름을 확실히 인지하는 데 걸린 노력과 시간이 제법 된다. 지난해에 이름을 알아내었는데도 자꾸 잊어버려 찾고 또 찾고, 외우고 또 외우기를 여러 차례, 이젠 기생초라는 또 다른 이름도 확실히 기억한다. 


이 꽃에 대해서는 특별한 정감이 있다. 춘자국은 그야말로 내 유년의 꽃이어서 공을 이렇게 들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일 년에 한 번 풀을 베도록 하려고 열어주는 사천 공군부대 비행장 활주로 들판은 춘자국 세상이었다. 그땐 그 꽃 이름을 알지 못했고 그냥 노란 코스모스라 불렀다. 사실은 주황색인데도.     

     


토요일 수필 모임 일로 서울 다녀왔다. 아이들 집에서 하루 지낸 후 일요일 내려왔는데, 처음에는 월요일에 동매리로 와 차밭 제초 작업을 할 예정이었으나, 차량 점검 등 할 일이 많아 화요일 오늘 동매리에 왔다. 이번 비에 바람이 좀 세게 불었는지 고추가 몇 그루 쓰러져 있었다. 한 그루는 가지가 부러지는 등 완전히 쓰러졌고 다섯여 그루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번엔 짐을 더 많이 가지고 왔다. 짐을 다 내리는 대로 쓰러진 고추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구름이 해를 ‘가리다 안 가리다’ 하기를 반복한다. 아직 장마 중이어서 그렇다. 이번 장마 중에 오늘 하늘이 제일 푸른 것 같다. 토마토도 역시 서너 그루 쓰러져 있었다. 고추도 잘 자라 많이 달렸지만, 토마토도 역시 주렁주렁 매달렸다.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데 바람까지 불었으니 안 쓰러지고 배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지지대 세우는 일을 처음 해봤다. 이번 일을 경험 삼아 내년엔 더 튼튼히, 더 보기 좋게 지지대를 세울 참이다. 바람은 부직포도 벗겨 버렸다. 참깨 두둑 두 개와 들깨 모종 부은 두둑 한 개가 누드로 드러나 있다. 입고 있는 옷이 강제로 벗겨진 형국이었다. 부직포를 씌워 심은 모종들이 잘 자라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너무 늦게 심은 것 같다. 지난해에 너무 빨리 심었기로, 또 참깨는 좀 늦게 심어야 한다고 해서 6월에 심었는데 사실은 좀 늦게 심은 것 같다.

지난번에 대대적으로 한 일은 연못 정비하는 일이었다. 풀을 다 뽑아내었고 바닥의 쌓인 펄도 긁어내었다. 그리고 출구를 막아 물을 더 많이 고이게 했다. 사실 그사이에 일부러 물을 많이 고이게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와서 호스를 통해 넘어오는 물을 보니 그전보다 물이 훨씬 더 맑았고 그래서 보기에도 더 좋았다. 앞으로는 계속 물을 많이 가둬둘 생각이다. 들깻잎도 많이 컸고 토란도 무성히 잘 자랐다. 지지대를 세워 주었더니 ‘마’ 줄기가 잘도 감고 올라간다. 사실 토란과 마는 처음 심어본 작물이다. 어릴 때 우리 집이나 동네에서 짓는 걸 보지 못한 농작물이다. 그래서 쑥쑥 감고 올라가는 마와 잘 자라면서 널따랗게 펴지는 토란잎은 신기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보는 눈이 한결 시원했다.     

     

저기 아래 동네의 K가 왔다. 자라는 차나무를 보더니, 잎이 오그라드는 병에 걸린 것 같다고 하면서 약을 살포해 주라고 한다. 그리고 밭을 맨 안쪽의 바위 위 짐승 배설물을 보고는, 산돼지 배설물이 아니라고 했다. 호랑이 과의 무슨 짐승 배설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살쾡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번 일의 일차적 목적은 차밭 제초 작업이다. 맨 안쪽의 풀부터 뽑았다. 오늘따라 구름은 해를 가려주지 않는다. 더위를 무릅쓰고 부지런히 일했다. 뻗어나가는 호박 넝쿨 아래의 왕성하던 풀까지 다 뽑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돌멩이도 골라내고 호미로 흙도 일구었으니 사실상 밭을 맨 셈이다. 씨앗을 심은 차나무 자리엔 어김없이 순이 올라와 있었다. 노출된 씨앗에서도 순이 자라는 걸 보니 차나무의 성장력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친 후 물가에서 몸을 씻었다. 끼얹는 바가지 물의 시원함이란. 이런 재미를 그 누가 알아줄까.      


그렇게 물 끼얹고 있는 나를 저기서 춘자국들이 보면서 건들거리고 있다. 유소년 시절의 주제는 청년 중년 장년에 이르러서도 주제인 모양이다. 그립던 그 춘자국을 이제 동매리 길뫼재 내 돌담 아래에서 보게 된다. 코스모스와 비슷한 시기에 코스모스와는 또 다른 무늬의 정이 든 춘자국을 여기 악양의 동매 마을 뒷산 내 뜰에 심어 꽃을 보게 되어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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