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805日
금암요 즉 ‘거문고 바위 가마’ 자리는 경남 사천시 이금동 고인돌 군락지의 한가운데다. 삼천포 변두리인 이곳에 갈 때 난 신화라는 단어를 곧장 떠올린다. 즉 이곳에 가면 신화의 숨결이 나도 모르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신화의 숨결, 신화의 세계를 부박한 내 머리로는 소묘조차 할 수 없다. 금암요의 도공인 달묵 선생을 찾아갈 때 황톳길 초입에서부터 그렇게 느낄 따름임을 말할 뿐이다. 악양 이곳에 인연을 맺은 후로는 금암요 방문이 처음이다. 초입에 들어서니 좁은 길, 황톳길 금암요의 그 길은 그 사이에 검은색 흰 띠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래도 신화의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교회나 성당, 사찰을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종교적인 건물들은 그 형태나 규모가 일반적인 것들보다 특이하고 크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곁에 이러한 종교적인 색채의 건축물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크고 멋진 신전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도 있었을까? 과연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믿던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을지를 살펴보자. 이것에 대한 답을 한반도 남쪽 해안의 사천 이금동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마을이 발견되었는데 생활공간과 무덤공간이 구분되며 생활공간의 중앙, 그리고 생활공간과 무덤공간의 사이에서 각각 한 채씩 거대한 지상건물이 발굴되었다. 생활공간의 대형건물은 지배자의 집, 혹은 마을 주민들이 모이던 공공건물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생활공간 쪽으로 입구를 가지고 무덤공간을 바라보는 지상건물은 생과 사를 이어주는 신전으로 해석하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이상, ‘History net’의 사천 이금동 유적과 신전 참조)
신전 건물터 발굴 기사를 어렵게 찾아 읽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경남 사천(삼천포) 시 이금동 항공 기능대학(현 한국 폴리텍기능대학) 부지 내에서 서기 전 5세기경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목조 건물터 두 곳이 발굴됐다. 이것은 BC1세기경 일본 이케가미소네 유적과 구조나 크기가 거의 같아 일본의 유적이 한반도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 주위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160여 개와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이 건물터가 동시대의 건물터임이 확인됐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건물과는 달리, 기중의 지름이 60cm, 건물의 측면 길이가 26m로 창고나 주거용 건물로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 건물의 위치는 생(生)의 공간인 주거공간과 사(死)의 공간인 고인돌(주변에 100여 기)의 중간에 있어서 신성한 구실을 한 공간으로 추측된다.” (조선일보 1999. 6.23, 수, 신형준 기자)
불타는 가마는 내 심중에 신화의 바람을 불러온다. ‘불타는 가마’ 옆에서의 보내는 하룻밤을 꿈꾸고 있었다. 꿈이었을 뿐 지금까지 ‘하룻밤’을 만들지 못했다. 이루지 못하는 꿈을 개꿈이라고 한다면 난 지금도 개꿈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8월 4일 토요일에 드디어 꿈 하나를 실현했다. ‘불타는 가마 옆 하룻밤 꿈’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먼 길 오신 두 분과 더불어 삼천포 금암요에서 그 밤을 지켰다. 불을 붙이고 불을 끄는 전 과정을 내가 뜬눈으로 지킨 건 아니지만 불을 붙일 때, 불이 탈 때, 불을 끌 때 금암요 주인의 옆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도공은 돌도끼 신화 속의 펄떡 벌떡 뜀박질의 사내 이미지였다.
지난번 가마를 털었을 때의 것일 차 그릇 세 개 내어 왔다. “교수님 것 하나, 햇살 것 하나, 사포 것 하나”라고 말했다. 잔의 그림은 입학(立鶴)이라고 했다. 오리, 한잔 걸친 닭, 삼족오 등의 청맹과니 우리의 물음에 도공은 진지하게 답했다. 가마의 불은 계속 타고 있었다. 그림풀이를 들으면서 난 입학이 아니면 어떻고 운학(雲鶴) 또는 취학(醉鶴)이면 어떠냐는 생각을 했다. 그보다 더 깊은 신화의 의미가 전해진다고 했다. 길러도 길러도, 두레박 모서리 다 닳도록 길러 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신화의 샘물 아닌가. 금암요 이 자리는 신화의 터 아닌가. 선대 이래로 280년을 살아온 터가 금암요 여기라는 말이 달묵 도공의 입에서 발설되고 그 발화(發話)가 내 귀에 착화(着話)되었을 때 다완 속의 서툰 입학은 신화의 새로 변모하고 있었다.
가지고 온 ‘입학 찻잔’을 동매리 내 원두막 대청에 놓았다. 바람이 분다. 산바람이고 들바람이다. 금암요 거기서는 입학 다기를 ‘이모저모’로 살폈는데 바람의 언덕 여기서는 ‘요모조모’로 눈을 굴렸다. 아무튼, 잔은 지금 초록 바람 속의 잔이다. 문득, 바람의 뒷모습이 궁금하다. “용기 있게 담을 넘어가는 바람의 뒷모습은 때론 휘날리는 매화 꽃잎이었을 뿐(박영현 / 바람의 뒷모습이 궁금하다)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불어 밤새 불탄 도요를 식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잠을 자고는 물길 잡고, 뒤란 풀 뽑고, 파도 뽑고 호박 빨간 고추 토마토도 따고 나팔도 분 후 잔, 바람 속의 잔 ‘입학 잔’을 거두어 부산 집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