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재를 시작하면서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예초기를 돌렸다. 한 시간쯤 풀을 벴을까. 샤워하고 밥을 먹고, 잠깐 쉬었다. 곧이어 내일 서울에서 내려올 막내딸 내외를 위한 밥상 준비차, 읍내 장에 찬감을 사러 가는 편의 편의를 위해 기사 노릇을 했다. 돌아와선 쑥떡 한 조각과 삶은 호박으로 점심을 때우고, 오수(午睡). 그리고 13시 30분, 우리 둘의 일상 같은 커피 타임.
마주 앉은 편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이녁 머리 꼬락서니가 그게 뭐요?” 폰에 있던 거울 앱을 지운 지 오래다. 대신 카메라 셀프 기능으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이게 뭐람? 헝클어진 머리에, 낯선 얼굴. 순간, 그냥 찍었다. 나도 모르게 오늘 내가 쓸 글의 첫 문장처럼,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열어버렸다.
며칠 전부터 ‘삶의 사계절을 돌아보는 시선’과 ‘노년기의 자각과 회한’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브런치 스토리’에 연재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제목을 삼 일간 붙들고 씨름하다가 마침내 떠올린 말: ‘노안(老眼)의 지평, 그리고 그 너머’. 바로 그 제목에 꼭 맞는 사진이, 뜻밖에도 오늘 오후 나 스스로 찍은, 나 자신의 얼굴이 되었다.
눈은 흐려졌지만, 대신 사물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젊었을 땐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선명한 글씨, 먼 곳의 표지판, 사람들의 얼굴. 그러나 지금은, 뚜렷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었다. 눈은 퇴화했지만, 시선은 성숙했다. 시선의 성숙이라니...
먼저, 이제 나는 사물의 겉보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던 시간의 결을 보려 한다. 말하자면 나무의 잎보다 그 잎이 달렸던 계절을 떠올리고, 찻잔의 무늬보다 그 잔을 들었던 손의 온기를 더듬으려 한다. 말하자면 감각의 시간성을 알아차려야겠다.
또한, 나는 사물의 외형보다 그 자리를 스쳐간 온기의 여운을 느끼고 싶다. 의자의 형태보다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의 무게를, 문지방보다 그 문을 몇 번이고 열던 손길을 상상해야겠다. 이제부터 존재의 여운을 더듬어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사물의 표면보다 그것이 오래 머물러 있던 침묵을 보고 싶다. 즉 표면의 색보다 그 색이 바래간 이유에 귀 기울이고, 물건의 윤곽보다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가늠하려 한다. 말하자면 시각의 초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이제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까? 나는 용렬하고, 사고의 폭도 넓지 못하며, 안목도 짧다. 과연 이 늦은 시절에, 대범하게 시선의 성숙에 이르는 길을 갈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면서도, 나는 글을 시작했다. 이 의심조차도 노안의 일부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내 시력이 괜찮다고 은근히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노안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노안은 내 감각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대신 새로운 감응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예전엔 길을 걷다 멀리 있는 간판 글씨를 읽지 못하면 초조해졌다. 지금은 간판 대신 그 아래 서 있는 사람의 자세, 멈춰 선 이유, 바람에 흔들리는 옷자락의 방향을 읽는다.
이제 내 눈은 정보를 수집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안목이 되었다. 노안(老眼)은 단순한 시력 저하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과한 눈, 고요 속에서 연마된 시선이다. 빨리 판단하지 않고, 쉽게 결론 내리지 않는 눈. 오래 바라보고,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결국엔 사물의 내면에 다다르는 눈이다.
눈앞의 세상은 점점 더 흐릿해지지만, 내 안의 지평은 점점 더 또렷해진다. 나는 이제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무엇을 놓치지 않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게 내 노안은, 단순한 감각의 쇠퇴가 아니라 새로운 통찰의 문이 되어 주고 있다.
이제 나는 그 지평선에 선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셀프 카메라로 찍힌 내 얼굴 그 낯선 모습이 내 안에서 문 하나를 연 듯하다. 이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 너머를 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