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이가 들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바람보다 먼저 눕던 몸이 이제는 바람이 멈춘 뒤에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02) 내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가끔 편이 사진 찍어 준다. 대개는 벙거지나 캡을 쓰고 있을 때인데 더러는 모자를 쓰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찍어 줄 때가 있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더도 덜도 말고 그대로의 내 모습이다. 이 사진이 그런 사진 중의 하나이다.
03) 사진 속의 나를 본다. 흰머리, 구부정한 어깨, 그리고 엷은 웃음. 어쩌면 그 웃음은 쑥스러움이 섞인 체념일 수도, 노동의 고요한 자부심일 수도 있다. 한 시절 열정으로 채웠던 강의실을 떠나, 이제는 마당 한 편의 고요 속에서 철학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04) 한때는 도시에서 일정을 조율하고, 사람을 만나고, 머릿속으로 세상을 설계하던 내가, 지금은 한 뼘의 마당 풀을 베는 데 온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 하루가 결코 가볍지 않다. 엔진의 소리 속에 묻혀 있던 내 숨소리가 들리고, 풀잎 하나를 자를 때마다 ‘이만하면 괜찮다’는 말이 마음 깊이 내려앉는다.
05) 정년퇴직 후, 나는 이제 더 이상 강단에 서지 않는다. 철학의 개념과 역사를 분해하고 조립하던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는 마당의 잡초와 철학한다. 칸트 대신 칡덩굴과, 하이데거 대신 호미와 마주하며 삶을 되새긴다. 말보다 손이 앞서고, 문장보다 흙이 가깝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일까, 철학이 더 깊어졌다고 느낀다.
06) 최근엔 예초기를 하나 새로 장만했다. 묵직한 엔진을 메고 마당에 나서면, 몸은 분명 무거운데 마음은 가벼워진다. 등에는 기계의 진동이 전해지고 손에서는 회전하는 줄 날이 풀을 밀어낸다. 그 무게와 소음 속에서 오히려 내 안의 조용한 시간이 깨어난다. 땅의 숨결과 맞닿는 이 노동이 내 안의 사유를 되살린다.
07) 풀은 매해 자란다. 아무리 베어도 돌아서면 다시 고개를 든다. 내 안의 의지도 그렇다. 한 계절이 저물고 나면 또 다른 계절이 피어난다. 늙음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점점 다르게 자라는 시간임을 나는 안다. 철학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의 또 다른 양태다.
08) 누군가 "당신의 늙음의 미학이 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사진의 이런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예초기를 멘 나의 등을, 흙과 풀과 함께 있는 나의 발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심히 감싸는 이 조용한 산기슭의 공기를 말이다. 그것은 무엇을 해내는 늙음이 아니라 무엇과 함께 있는 늙음, 누구보다도 나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다.
09) 사실 늙는다는 건 줄어드는 것이기도 하다. 식욕도 수면도 친구도 줄어듦을 새삼 실감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있다. 덜 중요한 것은 흐려지고 정말 소중한 것만 남는다. 너무 가까워서 미처 못 보던 편의 뒷모습, 매일 아침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쁨, 눈앞에 앉은 자녀들의 얼굴 등. 삶이 점점 단순해질수록 오히려 진해지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늙음의 향기'다.
10) 삶에 대한 나의 정의는 바뀌었다. "더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과 함께 있을 것인가"로. 예초기의 진동 속에 숨은 내 호흡, 풀잎 하나 베일 때마다 스며드는 ‘이만하면 괜찮다’는 감각 그것은 이론으로 배운 적 없는 진짜 사유의 자리다. 지금 내 철학은 사유가 아니라 '감응'이고, 해석이 아니라 '수용'이다. 이게 드러내고 싶은 '내 늙음의 미학'이다.
11) 나는 늙었고, 더 늙을 것이다. 주름은 감출 수 없어도 그 주름에 깃든 나의 서사만은 웃으며 간직할 수 있다. 어쩌면 늙는다는 건 조금씩 투명해지며 오히려 더욱 내 속이 드러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12) 나의 늙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침입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 길들여온 손님이다. 반가운 건 아니지만 내쫓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늙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