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서원에 왔다. 경남 사천시 사천읍 구암두문로 361-17(구암리 80)에 있는 이 서원은 조선 중기의 걸출한 문신이자 학자인 구암 이정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서원의 이름은 처음에 ‘구산’이었으나 후에 ‘구계’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인연은 중학생 시절 송충이잡이 때문이었고, 오늘 다시 찾게 된 계기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 때문이다.
첫 번째 인연, 송충이잡이
내가 사천중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초반, 그러니까 1960년에서 1962년 사이에 이곳에 몇 차례 다녀간 기억이 있으니, 이번 방문은 졸업 후 무려 60년 만의 일이 된다.
그 시절, 내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가. 학교에서 송충이잡이에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강제 동원 학습 활동’이었다. 오늘 오면서 거리를 재어보니, 승용차로도 단숨에 닿을 거리는 아니다. 그런 먼 길을, 그것도 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6월 무렵에 줄을 지어 걸어왔다. 중학생인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여름 땡볕의 행군이었다.
도착해서는 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충이는 몸체에 긴 털이 나 있어 징그럽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털에 독이 있어 살갗에 닿으면 따갑고 근질거리고 심지어 발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놈들을, 변변한 도구 하나 없이 그 자리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나무젓가락으로 일일이 집어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온몸이 오싹해진다.
그리고 그런 ‘숙제’가 또 있었다. 바로 쥐꼬리 가져오기. 지금은 아예 설명조차 낯설지만, 당시에는 생물 해충 방제 명목으로, 마치 실적을 평가하듯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잘라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쥐를 잡기도 무서웠고, 그 꼬리를 자르는 일은 더 무서웠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학교라는 공간이 지식을 배우는 곳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공포와 체험이 얽힌 기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전국적으로 송충이잡이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때에는 도심에서도 송충이가 잡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를 지나면서 그 흔적은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튼, 사천 지역이 낳은 뛰어난 성리학자 구암 이정 선생의 구계서원과 나의 첫 인연은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당혹스러운 송충이와의 조우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기억은 이제 다 지나간 일이지만, 송충이의 촉감과 쥐꼬리 숙제의 냄새는 여전히 뒷덜미 어딘가에 남아 있다.
두 번째 인연, 남명의 ‘유두류록’
중학생 시절의 불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구계서원에 다시 한번 꼭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그리고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뒤늦게 읽은 남명 조식 선생의 기행문 『유두류록 遊頭流錄』이었다. 남명은 1558년(명종 13) 음력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구암 선생 등과 함께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해서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유두류록>*은 바로 그때의 기록이다.
사천읍에 도착해 행정복지센터를 거쳐 15분여를 차로 달리니, 산기슭의 한적한 길가에서 ‘구계서원’ 이정표가 반겨주었다. 차에서 내려 서원을 올려다보니,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었다. 중학생 때 송충이잡이로 고생하던 바로 그 지형이 눈에 익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소나무의 수는 조금 줄어든 듯하고, 그 자리를 대나무들이 채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원으로 오르는 계단은 적절히 경사졌고, 전체적으로 청결하고 잘 관리되고 있어 경내를 둘러보는 동안 기분이 상쾌했다. 마침 산불 감시원이 나타나 말을 걸어와, 우리는 구계서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누며 한동안 정담을 나누었다.
구암 선생은 남명과 퇴계 두 학자와 깊이 교유했던 인물이다. 두 분 모두 구암보다 11살 연상이었고, 구암은 퇴계를 남명보다 늦게 알게 되었지만, 퇴계를 스승으로, 남명을 학문적 선배로 모셨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에서 유학 관련 서적을 다량으로 구해 와 조선 유학의 기초를 쌓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퇴계에게도 이 서적들을 많이 전달했다고 전한다. 어떤 이들은 퇴계 학문의 토대에 구암의 서적 공헌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암과 남명 사이에는 불미스러운 갈등이 생겼고, 안타깝게도 교유는 끊기게 된다.
『유두류록』은 남명과 구암이 처음부터 함께한 지리산 유람기다. 나는 그 여정의 첫자리에 있던 구암의 흔적을 따라 다시 이곳, 구계서원을 찾았다.
오늘날 구암 이정 선생은 퇴계나 남명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30여 년간 공직에 몸담았고, 55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사천에서 구계서원(당시는 구암정사)을 건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쓰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불과 3년 뒤인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에게 후학을 기를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오늘의 유학사 속 평형은 퇴계와 남명이라는 쌍두마차에 구암이라는 세 번째 바퀴가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감히 하는 망구 내 사견이다. 구암 선생은 자신의 마을 이름을 따서 ‘구암’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2세에 하과(夏課) 장원, 성균관 수학, 24세에 문과 장원급제. 단지 성리학에 밝은 학자일 뿐 아니라, 그 이른 시절부터 조선을 이끌 준비가 된 인재였다.
이제 구암과 남명이 배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악양으로 향했던 출발지, 사천군 축동면 구호리에 있는 쾌재정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송충이잡이 쓰린 기억은 다시 추억의 공간에다 고이 접어 넣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