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잎 향

손끝에서 피어나는 초록의 기억

by 로댄힐

뜰 구석에 무성히 자라 있는 박하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레 뜯어 손가락 끝으로 살짝 비벼 코에 대어 본다. 그 순간, 갇혀 있던 초록의 기억들이 섬세한 향기로 피어나 코끝을 간지럽힌다. 강렬하면서도 청량한, 마치 새벽 공기처럼 맑고 깨끗한 향기는 단순한 풀 내음을 넘어선 특별한 감각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박하는 번식력이 아주 강하다. 여러 해 전에 부근 국악인의 집에서 구해다 심은 박하 모종 서너 포기가 이제는 여기 악양 지리산 산기슭에 자리한 나의 처소, 길뫼재 돌담 아래의 긴 줄 화단 구석을 가득 채웠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박하잎을 따서 코에다 대겠다고 생각했지만, 매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생각이 나면 그렇게 하곤 한다.


쨍한 햇볕 아래 반짝이던 잎사귀들을 따서 손으로 뭉개면, 신기하게도 그 작은 몸집에서 온 세상을 깨우는 듯한 강렬한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향기는 달콤한 사탕의 향과는 달랐고, 화려한 꽃들의 향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풋풋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독특하고 매력적인 그 향기는 나의 감각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손가락 사이에서 부서지는 박하 잎의 촉감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잎맥을 따라 흐르는 미세한 물줄기가 느껴지는 듯하고, 그 작은 표면에는 햇살과 바람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비비는 순간, 잎 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방향유가 터져 나오며 비로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비밀의 문이 열리듯, 억눌렸던 향기가 자유롭게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1960년대 초, 내가 다니던 읍내 중학교 교문 앞 풍경은 늘 활기찼다. 등하굣길 학생들의 웅성거리며 오가는 틈바구니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뽐내던 보따리장수 아저씨, 커다란 보따리를 옆에 펼쳐놓고 앉아 계시던 그 아저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직 코흘리개 저학년 중학생 우리들을 유혹하는 다양한 물건들을 팔았던 것 같다. 연필이나 공책 같은 학용품부터 쫀드기, 뽑기 같은 군것질거리까지.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투명한 작은 원통형 플라스틱 통인데 그 속에는 박하 알갱이 솜 속에 감춰져 있었다.


"자, 이거 한번 맡아봐! 아주 그냥 잠이 확 달아나. 시험공부할 때 코에 대고 킁킁거려 봐. 머리가 번쩍 뜨일 거야! “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외치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 투명한 통 뚜껑을 열어 코에 대면 싸하고 시원한 박하 향기가 막힌 코를 뚫었다. 그 향은 지금 생각하니 갓 딴 박하 잎을 손으로 비볐을 때 느껴지는 그 싱그러움과는 또 다른, 농축되고 정제된 강렬한 청량함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박하 잎의 싱그러운 향기는 그 시절 교문 앞에서 맡았던 강렬한 박하 통 향과 묘하게 겹친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향과 인공적으로 농축된 달콤한 향. 비록 그 형태는 다르지만, 둘 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려주는 매개체가 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제는 그 교문 앞 보따리장수 아저씨의 모습도, 투명한 그 원통도 흐릿한 기억 속 한 조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문득 박하 잎 향기를 맡을 때면, 그 시절의 풋풋한 설렘과 함께 시험에 대한 긴장감,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박하사탕의 달콤함까지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초록의 기억은 때로는 달콤한 추억의 향기를 품고, 잊었던 시간 속 풍경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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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 대던 박하 통의 향기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능동적인 ‘깨어남’을 추구했다면, 입으로 먹던 박하사탕의 달콤함은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수동적인 ‘위안’을 얻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정신을 맑게 하여 현실에 맞설 힘을 주었고, 후자는 달콤함으로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오늘 맡게 된 박하잎 향기는 위의 두 가지 경험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코끝을 스치는 싸한 향처럼, 현실을 직시하고 능동적으로 헤쳐 나갈 용기를 얻고 싶을 때가 있다. 또 때로는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처럼, 고단한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위안을 얻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 박하는 우리 삶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것은 외부의 도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정신적인 각성’과, 내면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감각적인 위안’이다. 우리는 때로는 깨어 있어야 하고 또 때로는 달콤한 망각 속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초록의 기억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우리 삶의 철학을 은은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문득, 손끝에 남은 은은한 박하 향기를 맡으며 삶의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화려하고 거창한 것들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풀잎의 강렬한 생명력, 그 은은한 향기가 주는 위안은 지친 일상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박하잎 향, ‘손끝에서 피어나는 초록의 기억’은 단순한 향기를 넘어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은 마법과 같다.


오늘도 나는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박하 잎 하나를 통해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며, 미래에 대한 잔잔한 희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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