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언제나 그렇게 찾아온다. 어딘가 모르게 느슨해진 공기, 다정해진 햇살, 나뭇잎 사이로 흘러드는 바람의 온도 속에서 우리는 문득 계절의 전환을 알아챈다. 그러다 어느 날, 골목길이나 밭둑 모서리, 혹은 이름 모를 돌 틈 사이에서 보랏빛 꽃대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는 걸 발견하면, 5월이 성큼 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붓꽃이다.
붓꽃은 늘 말없이 피고, 조용히 진다. 여느 꽃들처럼 화려하게 피지 않고, 향기를 흩뿌리며 존재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제시간에 맞춰 조용히 자라나, 바람이 지나가는 틈을 타 고요한 흔들림으로 계절의 중심에 스며든다. 그것은 하나의 몸짓이다. 그리고 그 몸짓은 곧 나직한 속삭임이 된다. “나는 여기 있다”라고.
우리 밭둑의 돌 틈에 피어 있는 붓꽃 한 포기 앞에 나는 멈추어 섰다. 햇살 속에서 보랏빛은 더욱 깊어 보였고, 물오른 잎사귀는 바람을 타고 유연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잊히지 않은 과거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유소년 시절, 양철 지붕의 낡은 우리 집 뒤편 과수원 언덕에서 매년 보았던 붓꽃들. 비탈진 밭둑을 따라 피어 있던 그 작은 꽃무리는 어린 나의 시선을 오래 붙들어두곤 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과수원집’ 혹은 ‘양철집’으로 불렸다. 감나무 밤나무 등이 많은 과수원 속에 있어서 과수원집이었고, 지붕은 투박한 양철이어서 붙은 이름이 양철집이었다. 양철집 뒤편에는 붓꽃과 원추리가 나란히 자랐다. 우리는 그때 붓꽃을 ‘난초’라 불렀고, 원추리는 ‘비새’라고 했다.
두 식물은 마치 키를 재듯 자라며 꽃을 피워 올리기 경쟁이라도 하듯 했다. 원추리는 언제나 수수한 옷차림의 동네 어른들 같았다. 농사일로 검게 그을린 얼굴, 헌 작업복 같은 느낌의 농부 말이다. 반면 붓꽃은 기품 있는 단정한 차림새, 의연하고 고고한 자태였다. 나의 그런 인식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래서 13년 전, 이 산기슭에 터를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붓꽃을 심는 일이었다. 돌담 밭둑 이곳저곳에 흙을 고르고 뿌리를 조심스레 다듬으며 첫 삽을 떴던 그 감촉은 지금도 생생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조경이라 했지만, 내게는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일, 잊힌 시간을 부르는 조용한 의식이었다.
붓꽃은 내 유년의 일부였다. 매년 5월이면 그 보랏빛 꽃잎들이 조용히 피었고, 유년 그때 나는 그 곁을 지나칠 때 잠깐 멈춰 서서 바라보곤 했다. 아무 말 없이도 붓꽃은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어머니의 손길, 오후의 햇살, 바람과 흙냄새 같은 것들을. 그 모든 것이 붓꽃과 함께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이제 이 산기슭 길뫼재에도 해마다 붓꽃이 여기저기서 피고 진다. 붓꽃의 자리는 그래서 나의 기억과 시간이 뿌리내린 자리다. 붓꽃은 나의 유년을, 그 시절의 풍경과 감각을 오늘로 데려온다. 나는 그 앞에 조용히 서서, 잊히지 않은 삶의 조각들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기억은, 잊힌 것이 아니다. 잊혔다고 여겼던 어떤 순간들은, 적절한 자극을 만나면 다시 살아난다. 붓꽃 한 포기 앞에서 느껴지는 이 감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저편에 묻혀 있던 나의 한 조각이 지금, 이 봄날에 다시 깨어나는 일이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 시절의 햇살과 바람, 꽃잎의 흔들림은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삶의 많은 장면들을 잊는다. 순간들은 사라지고, 감정은 희미해진다. 하지만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붓꽃처럼, 기억은 언젠가 다시 피어난다.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암묵적인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너는 지금 여기 있지만, 그 모든 지난 순간들이 너를 만들었다”라고.
사라짐은 끝이 아니다. 사라짐은 또 다른 출현의 방식이다. 붓꽃은 피었다가 지지만, 그 자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도, 돌 틈을 비집고 올라온 그 꽃처럼 작은 자국이 남는다. 그리고 그 자국은 나로 하여금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잠시 멈추고, 조용히 들여다보고, 또다시 걷게 만든다. 이 한 포기 붓꽃 앞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은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소멸의 예감’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 붓꽃 앞에서 존재와 소멸에 대해 생각한다. 삶은 언제나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그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멸의 예감은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내 안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고,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든다. 마치 꽃이 질 것을 알기에, 그 피어남이 더 아름답게 보이듯이.
삶의 의미는 크고 거창한 데 있지 않다. 나는 그것을 붓꽃을 통해 배운다. 존재는, 어쩌면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상태다. 붓꽃은 묻지 않는다. 다만 거기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그 작고 고요한 존재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존재는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의미가 된다”라고.
5월은 지나간다. 늘 그러했듯, 올해도 조용히 나를 흔들어 놓고 또 다음 계절로 건너갈 것이다. 하지만 이 붓꽃과 함께한 잠깐의 시간은 오래 남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꽃을 본 기억이 아니라, 내 삶을 구성해 온 기억과 감정, 사유가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내년 5월에도, 또 어딘가에서 피어날 붓꽃 앞에서 나는 다시 멈추어 설 것이다. 존재는 그렇게 우리 앞에, 조용히 얼굴을 드러낸다. 삶은 늘 사라짐 속에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