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부심 2
어머니께서 생전에 자녀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던 일은 일본 경도(교토)에 계시던 시절, 성당 교리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셨고 그 부상으로 스위스제 금 손목시계를 받으셨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경도 한인 성당 본당 사제였던 목 요한 신부님(몬시뇰)에 대한 회상이었다.
교리경시대회의 기억
어머니의 교리경시대회 1등 수상 이야기는 내가 어린 시절 자주 들었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간간이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어머니가 일본 경도에 머무르신 시기는 두 차례였다. 한 번은 아홉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약 10년간(1차), 또 한 번은 한국에서 아버지와 결혼하신 뒤 다시 경도로 들어가 3년 정도 체류한 시기(2차)였다. 이 두 시기를 합치면 약 13년간 경도에 머무신 셈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훗날 부모님의 삶을 되짚어보며 확인한 것이지, 어릴 적엔 단지 부모님이 함께 경도에 계셨던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교리경시대회 1등도 부모님이 함께 계셨던 시절의 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살펴보니 두 시기가 명확히 나뉘고, 자연히 어머니가 금 손목시계를 받으신 시기가 더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내가 초·중학생일 때 목 요한 신부님 이야기를 특히 간절하게 하셨다. 그 기억에 기대어, 우선 어머니가 그 시계를 목 신부님으로부터 받으셨다고 가정해 보았다. 그렇다면 목 신부님은 경도 한인 성당에 언제 계셨을까?
자료를 확인해 보니, 목 신부님은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경도에 계셨다. 이 시기를 아버지의 이력서 기록과 대조해 보면, 부모님과 목 신부님이 경도에서 마주친 시기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로 보인다. 어머니가 그 시계를 목 신부님에게서 받으셨다면, 바로 이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확신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여, 그 시계는 어머니의 미혼 시절 즉 자기 부모님과 함께 경도에 머무르실 때 한인 성당에서 받으신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고 결론 내렸다.
목 요한 신부님에 대하여
목 요한 신부님(John E. Morris)은 미국 메리놀회 선교사로, 1923년 11월 26일 한국에 도착하여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셨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목이세’로 바꾸고 ‘목 신부’로 불리길 즐기셨다고 한다.
1930년에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교구장)에 임명되어 교구 발전에 힘쓰셨고, 1932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를 창설하셨다. 1934년 창간된 『가톨릭 연구』 역시 그의 주도로 이루어진 문서선교의 결실이었다. 그 외에도 가톨릭운동연맹 조직, ‘천주교 조선전래 150주년 기념식’ 개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정부와의 갈등이 깊어져, 1936년 7월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셨다가 1937년 4월 다시 일본 교토 가와라마치 중앙성당으로 부임하셨다. 당시 8만 명에 달하는 한인 신자들을 돌보며 특히 빈민과 병자들을 위로하고 돌보셨다고 한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 부모님도 이 성당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목 신부님을 간절히 회상하신 걸 보면 분명 깊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그 후 1942년부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사목을 맡으셨고, 1959년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인천 지역 본당에서 사목 하셨다.
이때, 귀국을 하여 진주 장재리(장재동)와 칠암동에 살다가 사천군 축동면 길평리 하동으로 이사 온 부모님, 내가 초등학교 6학년(1959년)에서 중학교 1학년(1960년)으로 올라가던 시기, 어머니는 “목 요한 신부님이 인천에 오셨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지 알아봐 줄 수 없겠느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시에는 교통, 통신 등의 여건이 좋지 않았고, 어린 나로선 알아봐 드릴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보니, 목 신부님은 실제로 1959년 10월 16일 다시 내한하여 인천에서 본당사목을 하신 것이 맞았다.
당시 일본은 외국인을 간첩으로 몰아 배척하는 분위기였기에, 제대보 아래 태극기를 깔고 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생명을 건 일이었다. 그러나 목 신부님은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그 위험한 일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셨다.
그분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이렇다. “주님과 같이 수난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처럼 살다 간 기도의 반려자이자 사랑의 설립자.” 1987년 7월 10일 선종하시기까지, 목 요한 몬시뇰은 한국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했던, 한국 가톨릭의 자랑스러운 선교사이셨다.
어머니와 '1등'의 자의식
어릴 적 어머니는 단호한 분이셨다. 그 태도에는 어머니 무의식 속에 자리한 '양반 의식'과 '1등 의식'이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어머니는 어느 날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나를 꾸짖으셨다. “걔는 달리기 1등 하던데 너는 그 꼴이 뭐냐. 니는 걔 꽁무니나 따라다녀라.” 그 말에 나는 크게 주눅이 들었고, 그 기억은 꽤 오랫동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당시 나는 5명이 뛰면 4등, 한 명이 넘어지면 3등 정도 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머니가 비교 대상으로 삼았던 그 친구보다 내가 삶의 여러 면에서 뒤처진 것도, 못한 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어머니의 그때 질책은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비교에는 ‘열등 비교’, ‘우등 비교’, ‘동등 비교’가 있다. “넌 왜 걔처럼 못 하니”는 열등 비교이고, “그래도 너는 풀도 잘 캐고 괭이질은 잘한다”라고 하면 우등 비교, “너도 걔만큼은 한다”는 동등 비교다. 교육자는 피교육자의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은 부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주눅 들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계, 남겨진 신앙유산
어머니의 그 금 손목시계는 나는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되었는지도 묻지 못했다. 궁핍한 살림 속에서 생활비로 처분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평생 교리에 밝으셨고, 사천 성당을 비롯해 여러 성당에서 팔순이 넘을 때까지도 남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받게 하셨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손목시계보다 더 빛나는 신앙의 유산을 남기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