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사천 축동

아버지의 이력서 1

by 로댄힐

아버지는 1966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나는 집을 떠나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두 해를 꿇은 끝에 어렵게 입학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봐도 아버지는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나신 편이었다. 참고로 1960년대 우리나라 평균 수명을 찾아보니 여성은 53.7세, 남성은 51.1세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주변 친구들의 아버지들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보다 무려 25년이나 더 오래 이 땅에 머무르고 있다. 요즘 들어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제한된 자료와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글로 남기고 있다.




아버지는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 6년 과정을 마치신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나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셨다. 당시 장면 박사께서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었으며, 어느 학년에서는 아버지의 담임 선생님이기도 하셨다고 한다.

졸업 후 아버지는 21세에 진주부(현 진주시청) 서기로 발령을 받았고, 월급은 25원으로 책정되었다. 그 금액이 현재 기준으로 어느 정도 가치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제법 안정적인 일자리였을 것이다. 22세에는 열여덟 살의 어머니와 혼인하신 후 직장을 그만두고, 젖먹이 큰아들(큰형)을 데리고 일본 경도(교토)로 이주하셨다.


아버지는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홉 살 무렵에 이미 경도에 자기 부모님을 따라 살러 가셨고, 아버지와 혼인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다시 떠난 두 번째 일본행이었다. 이후 귀국하실 때는 경도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작은형)도 함께였고, 다시 진주부에 재임용되어 근무하셨다. 그러나 28세 때 진주부를 완전히 떠나셨고, 실질적인 근무 기간은 일본 체류 기간(약 3년)을 제외하면 약 4년 정도였을 것이다.

진주부를 그만두신 지 2년 후, 31세가 되신 해에 진주 우마차조합 이사로 취임하셨고, 해방이 되던 1945년(2년째)에 사임하셨다. 우마차는 1940~50년대, 해방 전후 시기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당시엔 거의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짐을 주로 실었고, 사람은 주로 먼 길을 가는 이들이나 환자 위주로 태웠던 모양이다. 마차들은 철도 화물을 다루기 위해 정류소나 역 근처에 주로 대기했고, 사업용 우차는 조합에 가입해 운영되었다고 한다.


진주를 중심으로 함양, 산청, 사천, 남해, 하동 등의 지역에서 곡식을 실어 나르며 밤새 수십 대가 떼를 지어 운행했다고 한다. 당시 마부는 월급제로 일했으며, 우마차는 자동차 등장 이전까지 거의 유일한 화물 운송 수단이었다.


이듬해인 1946년, 33세의 아버지는 진주에 있던 조흥토건주식회사 임원으로 취임하셨고, 약 3년간 근무 후 사임하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진주에는 '죽본조(竹本組)'라는 건설회사가 있었는데, 진주 최초의 전문건설업체로 지역 주요 공사를 독점했고, 부산의 대형 공사까지도 수행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적산기업이 되어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이 운영했으며, 1946년부터 ‘조흥토건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다가 이후 사라졌다.




1950년, 아버지 나이 36세에 부모님은 진주 장재리와 칠암동을 떠나 사천군 축동면 하동의 과수원으로 이사하셨다. 하지만 이사 한 달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아버지는 마지막 직장인 사천군 축동면에서 부면장으로 봉직하셨으나, 3.15 부정선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압력을 받아 결국 사임하셨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이력 중 우마차조합과 조흥토건 근무 시절이 궁금했지만, 쉽게 알 수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덕분에 당시 진주의 교통과 산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삶은 유학을 위해 잠시 머문 서울을 제외하면 진주–경도–사천 세 지역으로 요약된다. 조흥토건 근무를 마지막으로 진주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사천 축동의 삶을 시작하셨으며, 나는 세 살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집에 대한 첫 기억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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