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겁결 물논(水畓)

아버지의 이력서 2

by 로댄힐

아버지는 1950년 36세 때 식솔들을 모두 이끌고 사천군 축동면 길평리 하동의 과수원으로 이사하여, 2년 후 축동면 근무를 시작하셨다. 6.25 한국전쟁 발발 한 달 전에 이사 내려왔을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 2명, 누나 1명 그리고 막 태어난 동생 1명 등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때 형님 두 분은 진주 배영초등학교에서 축동초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때 우리 과수원은 축동면 전체를 통틀어 봐도 드물게 감나무, 밤나무, 풍계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심어진 거의 유일한 과수원이었다. 약 3,000평 정도로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내 눈에는 무척이나 넓고 웅장하게 보였다. 이 과수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조성한 것이었다. 진주에서 사천으로 이사 올 당시의 경위를 큰 형님께 여쭤보니, 과수원 옆 마을에 계시던 친척 할아버지께서 소구루마(수레)로 이삿짐을 나르셨던 것으로 보아 그분의 소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다.


그 과수원에서 우리는 6·25 전쟁을 겪었고, 나의 어린 시절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집은 낡았지만 제법 규모가 있었다. 방 세 칸과 청마루 두 곳, 양철지붕의 본채가 있었고, 초가지붕의 아래채와 창고, 변소, 돼지우리도 있었다. 특히 장독대는 꽤 넓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아카시나무 울타리와 짙은 밤나무·감나무 숲 때문에 밤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일본인이 만든 과수원이라는데, 집 옆으로 길게 늘어진 무궁화 울타리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압도적인 규모였다. 그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겪은 6·25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C-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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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진주시와 사천군은 1950년 7월 31일부터 9월 24일까지 약 56일간 인민군 점령하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과수원도 격전지였는데, UN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주둔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집을 비우고 피난을 갔다. 미군이 남긴 전투식량(C-ration) — 소고기 스튜, 비스킷, 초콜릿, 커피, 껌, 과자, 땅콩, 베이컨, 심지어 비누와 화장품까지 담긴 캔들 — 은 우리 형제들이 6·25를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추억이다. 미군은 그냥 남긴 것이 아니라 땅에 묻어두고 갔는데,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보물 찾기처럼 오래도록 즐기던 놀이였다고 형님들은 회상하셨다.


엉겁결 물논 피난

016-2.jpg 과수원 우리 집에서 바라본 와룡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전 추석 무렵, 유엔군이 통영 혹은 고성 앞바다를 통해 상륙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이때 과수원 우리 집은 교전의 중심에 놓였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피신했지만, 우리 집은 소개령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 총소리에 놀라 급히 피난을 나섰는데 하필이면 그 길이 교전지 한가운데였다. 진퇴양난의 순간, 아버지는 모가 무성히 자란, 거머리가 들끓던 물논에 일곱 식구를 모두 눕게 하셨다. 아버지의 기지 덕분에 갓난아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상황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 같은 당부의 말도 지금도 생생하다.


모캣불


그 시절, 우리 저녁밥상은 마당 한복판 덕석 위에 차려졌고, 그 옆에는 모캣불을 피웠다. 아버지 밥상만 따로 차렸고, 나머지 가족은 상 없이 바닥에 그릇을 놓고 둘러앉았다. 아버지는 마르고 야윈 몸이었고, 그 팔목에 안겨 오던 한 아름 풀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감나무, 밤나무, 아카시나무, 무궁화나무에 들끓던 벌레를 쫓기 위해 아버지는 날마다 모캣불을 피우셨다. 하지만 모기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대청마루의 불빛

016-1.jpg 당시 빨치산 은거지였다는 와룡골

우리 집엔 마루가 두 개 있었다. 안방 앞 마루는 문이 있어 비를 맞지 않았고, 옆방 앞 마루는 비가 오면 늘 젖었다. 퇴색한 마루였지만 거기 앉으면 신작로의 버스나 와룡산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 휴전이 되지 않은 그 여름,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계시다 가끔 와룡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빨갱이(빨치산)가 놓은 불”이라 말씀하셨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그 시기 와룡산을 중심으로 용현면부터 삼천포까지 빨치산 활동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016-4.jpg 지금의 와룡골

또 어떤 날에는 “저건 인불이다”라고 하셨다. 인불, 혼불, 도깨비불이라 불리던 그 불빛들은 전깃불도 가로등도 없던 시절, 밤하늘에 유난히 자주 나타났다.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와 무덤 근처를 날아다닌다는 푸른 불빛. 그 인불은 훗날 강원도 화천 대성산 기슭 군복무 중에도 보았다. 인(燐) 성분 때문이라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께 들은 “빨치산 불, 인불”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1952년, 우리가 이사 온 지 2년 후 아버지는 축동면 사무소에서 근무를 시작하셨다. 나는 그때 다섯 살, 겨울.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에서 배탈이 나 항문이 빠진 채, 통시(화장실)를 멀리 두고 그 앞에서 꼼짝없이 서 있던 기억. 그것이 6·25 2년 후, 다섯 살 나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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