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두 척, 아주 오래전 사진이다. 하나는 앞이 부서지고 칠이 벗겨졌으며, 다른 하나는 그래도 아직 다소 온전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둘 다, 이미 밀려오고 떠내려온 시간의 흔적을 안고 있다. 나는 신흥리 포구에서 아주 오래전에 찍은 이 사진을 가끔 꺼내 배들을 본다. 그리고 문득, 나 자신의 항해를 떠올린다.
건너온 시간의 바다
돌이켜보면, 이 나이쯤 되니 참으로 많은 바다를 건너왔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겐들 그렇지 않았으랴만, 나의 바다도 풍랑이 여러 차례 있었고, 어떤 날은 저 너머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사진 속의 저 배처럼 떠 있었다. 가라앉지 않았고, 쓸려가 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흔들리면서도 어떻게든 나아왔다.
배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 바다는 그렇지 않다. 움직이고 바다 그 위의 것들은 흐르고, 흘렀고, 또 떠 있다. 삶도 그런 것 같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듯 살아왔지만, 실은 매 순간 시간이라는 바다의 너울을 따라 이동하고 있다.
사진 속, 앞쪽의 낡은 나무배는 마치 내 젊은 날 같다. 지나친 의욕으로 흔들렸고, 무리한 방향 전환으로 상처가 났고, 다짐과 후회로 거칠게 긁힌 흔적이 배의 나뭇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몇몇 부분은 깨졌고, 덧댄 자국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덧댐과 균열 덕분에 이 배는 지금도 바다 위에 있다. 나는 가끔 묻는다. 넓은 바다 세파(世波)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다 곧 깨닫는다. 바람이 도와주었고, 파도가 길을 만들어 주었으며,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노 하나가 깊은 어둠 속에서도 조용히 방향을 잡아주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진 속, 뒤쪽의 조금 더 온전해 보이는 배를 바라본다. 선체는 아직 다소 말끔해 보이지만, 그 안쪽은 비어 있고 오래된 흔적이 묻어 있다. 그 배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본다. 겉으로는 아직 말쑥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세월 속에서 부딪히고, 깎이고, 속이 조금씩 비어 온 존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바다 위에 떠 있다. 파도에 밀리지 않고, 뒤집히지 않고, 조용히 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속도도, 목적지도 아니다. 지금도 내가 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바다가 여전히 나를 떠받쳐주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다.
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나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셀 수는 없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하다. 시간의 바다는 나를 침몰시키기 위해 출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나’로 빚어내기 위해 출렁였다 것.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 노를 쥐어본다. 더는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바다에 내가 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바다가 여전히 나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항해하는 바다-패티 김의 ‘인생은 작은 배’에 기대어
인생은 작은 배다. 풍랑을 이길 만한 배도 아니고, 수많은 짐을 실을 넉넉한 배도 아니다. 그저 하루치 마음과 한 줌의 바람, 그리고 그리움 몇 조각이면 간신히 떠 있는 그런 배 말이다.
나는 그 배를 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뚜렷이 알지 못한 채 다만 물살 따라, 바람 따라 가끔은 기억을 거슬러, 가끔은 후회를 실어 천천히 바다를 건넌다.
미움을 실기에는 이 배는 너무 작다. 그건 늘 배 밑으로 가라앉고 남는 건 그리움뿐이다. 떠난 이의 이름, 놓친 계절, 하지 못한 말들이 물결 위에 반짝인다.
사랑 없는 날은 노 저을 힘마저 나지 않는다. 구름이 바람 없이 떠나지 못하듯, 내 배도 사랑 없이는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다. 한 사람의 손, 한 마디의 다정한 말, 또는 어느 날 오후 커피 향 같은 것이 나를 다시 바다 위에 띄워준다.
세월이 흐른다. 그 위에서 나는 늙고, 배는 더 낡아지지만, 별빛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사랑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세월 따라 떠나도, 그 사랑은 저 먼 수평선 끝에서 여전히 등을 밝혀준다.
나는 오늘도 항해한다. 다다를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배를 멈추지 않는다. 이 배의 목적은 항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움은 남기지 않고, 그리움과 사랑만 싣고서 나는 내 바다를 조용히 항해하는 중이다.
나는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살아왔다. 항해란 목적지보다 방향을 지키는 일이고, 망망한 수평선 속에서 나만의 리듬으로 노를 젓는 일이었다.
내가 항해하는 바다는 조용했지만 때로는 위험했다. 파도가 크지 않아도 내 안의 물결은 자주 출렁였고, 물결이 잠잠해도 내 마음의 등대는 자주 꺼졌다.
그래도 나는 배를 놓지 않았다. 배는 낡았고, 노는 닳았고, 돛은 바람을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 삶의 모습이었다. 정비되지 않은 채 출항했고, 지도 한 장 없이 유영했으며, 무엇보다 혼자만의 바다를 건넜다.
누구는 나에게 말했다. “왜 아직 저기 저렇게 머물러 있느냐고, 그 배로는 어디도 갈 수 없다고.”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이미 수많은 파도를 넘었고, 더 깊은 곳까지 와 있었다는 것을.
내가 항해하는 바다는 누군가의 바다와 겹치지 않았다. 때로는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멀리 떨어진 별빛 아래 홀로의 항로를 그려왔다. 그 항로 위에는 이름도, 좌표도 남기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저 조용히, 물살에 파묻히듯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항해란 결국 흔적 없는 길을 걷는 일이다. 이제 바다 위의 바람은 부드럽고, 노를 젓는 팔에도 관절의 경고음이 들리지만, 나는 여전히 항해를 멈출 생각이 없다. 속도는 늦어도, 목적은 명확하지 않아도 이 바다에 ‘나’라는 존재가 떠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항해하는 바다는 끝나지 않는다. 어떤 육지도, 도착도 필요 없다. 이 배를 타고, 이 노를 잡고, 오늘의 물결 위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항해다.
등대는 내 안에 있었다
한때 나는 등대를 바라보며 살았다. 어둡고 낯선 해안가에서 내가 어디쯤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불빛이 늘 필요했다. 누군가의 말, 책 속 문장, 세상의 방향성, 그것들이 나를 이끌어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진짜 등대는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 빛은 다름 아닌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시간은 조용히 내면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눈은 예전보다 흐려졌지만, 마음의 시야는 한층 깊어졌고, 이제는 남의 말보다 내 안의 침묵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오래전 어느 봄에 다녀온 저 청산도의 붉은 등대와 하얀 등대 사이를 지나던 그 작은 배처럼, 나는 외부의 불빛을 좇아 물살을 헤치며 살아왔다.
청산도, 유채꽃이 바람에 일렁이던 어느 4월의 기억이다. 멀찍이 바다를 향해 서 있던 등대 둘, 돌담을 두른 초가집 앞뒤의 노란 유채밭 그 색상의 배경 때문이었을까, 그건 보내고 기다리는 두 사람의 애틋한 표상이었다.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 <서편제>의 여운처럼, 그 풍경은 아련하고 쓸쓸하고 또 그리웠다. 그 등대들 너머로는 바람도 잠잠한 남도의 수평선... 나는 그 두 등대 한 장면 앞에서,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의 뿌리를 느꼈다.
아무튼, 파도와 바람 속에서 흔들리던 시간들, 고요한 물가에 닻을 내리고 숨을 고르던 순간들, 그 모든 시간이 내 안의 등대를 지켜온 것이었다.
외로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틴 날들, 쓰러지고도 조용히 일어나 다시 길을 걸어간 발걸음들, 누군가에게 말없이 내민 따뜻한 손길, 그 모두가 등대의 불씨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조급하게 길을 찾지 않는다. 무언가를 안다고 쉽게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둠 속에서도 내 안의 불빛이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고 흔들리고 있음을 믿는다. 그 불빛은 작지만, 분명히 지금까지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힘이다.
한때는 저 멀리 있는 등대를 향해 노를 젓고, 헤엄치고, 때로는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타고 있던 그 낡고 오래된 배의 한가운데, 이미 등대는 놓여 있었다는 것을.
그 빛은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나를 돌아보려 할 때마다, 희미하지만, 그러나 선명한 그 불빛은 나를 안으로, 그리고 앞으로 이끈다.
이제 나는 묻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대신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지금 등대 곁에 있다. 아니, 등대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