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가을, 편과 함께 삼천포 실안 해안도로를 따라 광포만을 지나던 중이었다. 길가에 조용히 자리 잡은 찻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쪽빛 언덕’. 우리는 이끌리듯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마주 앉으니 창 아래 바다엔 밧줄에 묶인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마치 세월의 포로처럼, 꼼짝도 않고 고요히 멈춰 있었다. 그리고 벽 한쪽에는 ‘쪽빛 언덕’이라는 제목의 시가 적힌 자줏빛 베가 걸려 있었다.
늘 푸른 광포만 바라보다가
그 언덕도 어느덧 쪽물이 들고
늘 고운 그 님만 바라보다가
내 가슴도 어느덧
그리움 이네
2001년 5월 차 한잔 들고
- 朴-
편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저 광포만 바다의 정서를 잘 담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찻집 주인에게 저 朴이라는 시인이 누구인지, 쿠웨이트 朴인자 물었더니, 무슨무슨 시인이라며 알려주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이야기 끝에 내가 삼천포와 남해 창선도를 잇는 도선 ‘금남호’에 대해 말하자, 뜻밖에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 양반이 금남호 도선 사장이에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배에 얽힌 특별한 정서가 내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1978년 아마 그해 여름방학 기간, 나는 교사자격증 사본을 붙인 이력서를 손에 들고 취직할 생각 하나로 무작정 남해 창선도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서울의 있던 곳에서 나와서는 대책 없이 내려온 시골집, 거기서 머물며 보낸 1년은 말 그대로 ‘칠흑 동굴의 시간’이었고 그래서 일자리를 잡는 일이 그때 내게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몇 군데 이력서를 우편으로 보냈지만, 소식은 없었다. 단 한 곳, 해외 건설을 주로 하는 어떤 회사에서만 답장이 왔다.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그마저도 감격스러웠다. 누군가 내 가능성을 본 것 같아서.
창선도는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창선도는 그 절박한 여정의 끝에 선 선택지였다. 이력서를 들고 취직자리를 직접 찾아 나선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삼천포에 가면 창선도로 가는 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섬은 대개 아름답지만, 그때의 창선도는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단지 너무 가까워서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딘가 쓸쓸하게 보였다. 멀리서 바라볼 때만큼이나, 가까이서 마주한 그 섬의 산과 능선은 아련하고 고요했다. 그것이 어쩌면 ‘쓸쓸한 아름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선을 타고 건너간 섬, 창선도의 포구에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배의 이름은 ‘금남호’. 삼천포와 창선을 잇는 단항 선착장을 오가던 도선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과 짐과 자동차를 함께 싣고 바다를 건너는 배를 타보았다. 그 배 금남호는 소박한 도선이었지만, 내게는 인생의 갈림길로 가는 배라고 느껴졌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면 소재지까지 갔던 것 같다. C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에는 유독 대나무가 많았다. 대밭이 이어져 있어, 아래위 마을을 ‘상죽 마을’과 ‘하죽 마을’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학교 앞 솔숲이 깔리는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할 무렵, 퇴짜를 맞고 돌아 나오는 길. 댓잎이 스치는 소리, 솔잎이 부딪히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도 스산했다. 그 길에서 바라본 삼천포 앞바다에는 막 불을 밝히기 시작한 배들이 떠 있었고, 더 작은 섬들을 돌아 이 섬으로 향하는 배들의 불빛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 솔숲을 지나며 들려오던 댓잎과 솔잎의 마른 소리는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2000년이 되기 직전의 여름,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그 길을 찾았다. 똑같은 바다 위를 건넜지만, 이번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상쾌하고 다정한 뱃길이었다. 편과 아이들과 함께였다. 차를 금남호에 싣고 창선도로 건너가는 20여 분의 항해. 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이 섬은, 아빠가 젊은 시절 취직 자리를 찾아 처음으로 혼자 왔던 곳이라고. 그리고 이 배가, 바로 그때 탔던 배라고. 차를 배에서 내려 미조까지 몰고 갔다. 여행은 상쾌했고, 기억은 편안했다. 그날 바라본 바다 위의 막대기에 앉은 새들은 쓸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8년, 그 처음의 날은 달랐다. 발걸음이 무겁고 머뭇거리던 길. 낯선 땅에서 망설임을 품고 걷던 길. 마음속에 아직 온전한 방향이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 시절, 창선도의 학교가 나를 받아주었더라면 내 인생의 풍경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 또한 참 괜찮다. 삶은 그렇게 흘러왔고, 나는 다만 그 시절의 내가 건넜던 바다를, 그 배를,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이제 창선도와 삼천포는 네 개의 연륙교로 단단히 이어졌다. 각기 다른 이름과 구조로 네 개의 섬을 잇고 있는 그 다리들 때문에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고, 바다는 더 이상 건너야 할 경계가 아니다. 이제 섬과 뭍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섬이면서 뭍이고, 뭍이면서 섬이다. 금남호는, 그 배는 더는 다니지 않는다. 뱃길도, 찻집도, 시간도 모두 변했다. 금남호가 다니던 그 뱃길은 벌써 끊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 2025년의 지금, ‘쪽빛 언덕’ 찻집도 이미 일반 음식점으로 바뀌어버렸다. 금남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어딘가에서 사람과 짐과 차를 실어 나르고 있을까. 아니면 고철로 해체되어 버렸을까. 이제는 물어볼 곳조차 없다.
하지만 나에게 금남호는 여전히 그 바다 위에 있다. 사람과 짐과 인생의 한 단면을 싣고 건너던, 어느 여름날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웠던 추억 속의 배. 그래서 나에게 금남호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한때 절박했던 내 마음을 싣고 바다를 건너갔던, 왕복 단 한 번의 항해, 그 배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회상’으로 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