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아버지의 공간

by 로댄힐

큰방에서 드나들 수 있는 안방은 아버지의 공간이었다. 아버지 방, 그 안의 사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 방‘ 바닥에는 늘 종합 월간지가 놓여 있었다. 이름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신태양》이나 《사상계》였던 듯하다. 1950~60년대 초는 전쟁 이후 재건기의 시절로, 이런 종합지는 문학과 시사, 사회, 예술을 두루 담아 지식인과 대중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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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지 뒷부분에 실린 소설과 야담을 즐겨 읽으며 ‘소서행장’이나 ‘가등청정’ 같은 임진왜란 왜장들의 이름을 익혔고, “청산리 벽계수야”로 시작하는 황진이의 시도 처음 접했다. 정작 앞부분의 정치 기사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마 《사상계》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방 그 바닥에는 또 경향신문도 있었다. 창간 때부터 반공적이고 보수적 성격을 띠어온 이 신문은 1959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야당성과 반독재 노선을 분명하게 하였다. 특히 가톨릭인 부통령 장면(張勉)의 피습사건 후 논조가 더욱 강경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어서 당시 발행 부수 20만이라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1959년 2월 4일 자 조간에 실린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내용의 기사 때문에 강제 폐간당했다가 4·19 혁명이 발발, 대법원 결정에 따라 1960년 4월부터 복간되었다. 내가 중학교 다니는 1960년~62년 3년 동안 사천읍 지국에서 이 신문을 받아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그 지국은 가정집으로서 당시 사천 동성국민학교와 드무 고개 정상 중간 지점에 있었다.


아버지 방의 선반에는 끈으로 묶은 고서적이 여러 권 있었다. 그런 책을 ‘선장본(線裝本)’이라 한다는데, 족보를 비롯한 여러 권의 책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모두 사라졌다.


그 선반에는 또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도 약봉지도 있었다. 기와 혈을 보하는 보약이라는데, 인삼과 당귀, 황기 등 열 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나는 그 붉은 글씨가 찍힌 포장지를 또렷이 기억한다.


안방은 봄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즉 방 윗목이 고구마 묘판이 되었다. 아버지는 판자로 칸을 만들어 황토를 깔고, 그 위에 볏짚과 왕겨를 섞어 열이 고르게 돌게 하셨다. 씨고구마를 눕히고 흙으로 덮은 뒤 볏짚을 덮어 보온하면, 며칠 지나 파릇한 싹이 올라왔다. 나는 방 안 가득 번지던 흙냄새와 고구마 순 냄새를 잊을 수 없다. 그 냄새는 지금 맡을 수 없지만, 그 시절 안방은 분명 ‘생명의 터’였다.


돌아보면, 유소년기를 보낸 양철집의 그 안방은 나의 작은 학교이자 배움터였다. 낡은 양철집 그곳과 그곳의 아버지 공간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 중요한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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