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나’는 ‘나’를 만났다

by 로댄힐

나에게는 유소년, 중고등 시절의 사진이 거의 없다. 모두 분실해서 그렇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내게는 없는 ‘12살의 나’ 사진을 구했다. 사진 속의 나는 국민학교 졸업식 직전에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모양이다.


12살 나, 대두, 짱구 머리 또 쥐눈이지만 반갑고 생소하다. 갑자기 보르헤스가 20대의 자기를 만나 나누는 대화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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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단편 「타자」는 70세의 보르헤스가 20대의 자기 자신을 만나는 환상적인 대화를 그린다. 장소는 서로 다른데, 노년의 보르헤스는 제네바의 공원 벤치에, 젊은 보르헤스는 보스턴의 찰스 강변 벤치에 앉아 있다. 서로의 공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대화를 나눈다.


먼저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다. 젊은 보르헤스는 눈앞의 노인을 이상하게 여기며 자신을 놀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늙은 보르헤스는 그에게 차분히 “나는 네가 될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젊은 보르헤스는 믿지 않는다. “나는 너의 미래에서 왔다.” “그럴 리 없어요. 내 미래가 이렇게 평범할 리 없잖아요.”


둘은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며 자신이 실제로 같은 인물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젊은 보르헤스는 미래의 자신이 문학적으로 성공했는지 묻고, 늙은 보르헤스는 “그렇지만 그 성공이 의미 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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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열두 살의 나”를 만났다. 그가 예고 없이 내 앞에 나타났다. 당황, 이 아이가 ‘나’ 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이봐, 네가 바로 나야. 아주 먼 미래에서 왔어.”


이마가 불쑥 나온 '소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다. “그럴 리 없어요. 나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데, 그 나이에 벌써 머리가 이렇게 희어질 리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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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단다. 넌 네가 늙지 않을 거라 믿지만,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서 나를 보게 될 거야.”


소년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묻는다. “그럼, 나는 나중에 무엇이 되나요?”


“글쎄다. 네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보고 느끼는 세상, 그 모든 것이 언젠가 한 줄의 문장이 된다는 거야.”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다. “그럼 나는 그 문장의 주인공인가요?”


“아니, 너는 내 문장의 시작이지.”


사진 속 나(아이)의 눈빛이 바람처럼 흔들리고, 나는 천천히 사진 속으로 녹아든다. 그 순간, 역행하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지금 털고 있는 들깻단의 먼지 사이로 어린 내가 손을 흔든다. “잘 가요, 미래의 나.”


나는 대답한다. “고맙다, 과거의 나. 네가 나를 만들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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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깻단을 막대기로 때리고 있던 편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 본다.


“일하다 말고 뭐 하고 있소? 들깻단 빨리 가지고 오소. 털게!”


나는 들깻단을 나르다 말고 잠시 서서, 불과 얼마 전에 가입한 중딩 동창 단톡방을 열었는데, 거기 올라와 있는 내 사진을 보고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유소년 시절 이후로 가장 오랜 기간 친구인 대식이가 거기에 사진을 올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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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나’는 ‘나’를 만났다.


축동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사진 찍히겠다고 폼 잡고 있는 ‘12살 나’와 악양 동매마을 산기슭 길뫼재 밭에서 깻단 나르는 ‘팔순 직전의 나’는, 서로 다른 시간대와 공간대인지라 당황했지만, '12살 내'가' 미래의 나'를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아 안도되었다.


여운이 오래갈 것 같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나는 '12살 나'에게서 문장에 관심 있음을 발견하고 오늘의 나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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