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둑길을 만들고서 110216
한 삽, 두 삽 흙을 퍼 나르며 길을 다듬는다. 내가 걸을 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이 짧은 구간을 과연 ‘길’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길은? 길을 찾으니 “첫째,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 둘째, 물 위나 공중에서 일정하게 다니는 곳. 셋째, 걷거나 탈것을 타고 어느 곳으로 가는 노정”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확인하려고 했던 건 ‘길이’인데 ‘너비’에 대한 언급은 있어도 길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면 짧아도 길이다.
처음엔 그냥 밭의 끝자락이었는데 조금씩 다듬어서 길을 냈고, 그 옆으로는 도랑을 내고서는, 묻혀 있는 관으로 들어가는 연못 물을 돌려 물이 흐르게도 했다. 그건 범이와 호비가 마시게 하기 위해서다.
이번 겨울엔 마음먹고 더 많은 흙을 퍼 날랐다. 길바닥을 평평하게 다져 잔디를 심기 위해서다. 잔디까지 깔고 나면 발바닥이 누릴 평온함과 안정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았다.
이 밭과 인연을 맺은 초부터 “언젠가 이 밭을 한 바퀴 돌아 걷겠다”라는 생각을 품었다. 새벽엔 새벽대로, 낮엔 낮대로, 석양이 질 땐 석양을 바라보며 혹은 등지고서 - 아무 생각 없이, 또 때로는 생각에 잠기며 발걸음을 이어왔다. 요즘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걷는 일이 늘었다. 걷다 보면 길이 제대로 난 게 아니라서 울퉁불퉁한 바닥을 고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실천할 틈이 없다가 이번 겨울엔 작정하고 삽을 든 거다.
길을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있는가?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길에 내 손을 보탠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치돗가 부역’에 집 대표로 나가 자갈을 나르고, 산비탈에서 퍼온 검은 돌과 썩돌을 깨고 까는 일을 했던 기억은 있다. 어린 몸으로 버거웠던 그 시간이 이제는 아련하게만 남아 있다.
이 길은,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내가 온전히 손수 만든 길이다. 밭길을 지나 둑길로 이어져 더 멀리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오롯이 나의 발걸음을 위한 길. 둑길 역시 흙을 삽으로 퍼다 날라서는 평평하게 다졌다.
밭일 중에 떼는 걸음도 걸음이지만, 일없이 생각 없이 뗄 발걸음도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밭을 한 바퀴 둥글게 도는 이 밭둑길은 더욱 나의 길이다. 앞으로도 생각을 놓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그런 길로 다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