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01
개구리알 더미 옆에 죽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비가 100밀리 가까이 내렸으니, 움푹 팬 곳곳에 물이 고였을 것이다. 아마 그 고인 물을 보고 오래갈 물이라 생각해 알을 낳았던 모양이다. 땅은 젖어 있었지만 정작 물은 남지 않았다.
개구리알만 수북이 남은 그 자리를 잠시 뒤 다시 와서 보니, 죽어 있던 개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치운 것도 아니고, 편도 치우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편이 먼저 나에게 “죽은 개구리 치웠느냐”라고 물었을 정도다. 그렇다면 사람 손이 갈 리 없다. 범이나 호비가 접근할 만한 거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살아서 어디론가 기어갔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득 바로 옆 밭둑에 새로 생긴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쥐구멍이었다. 아마 쥐가 개구리를 물어 그 구멍으로 끌고 들어간 듯했다. 창고에 들락거리던 그 쥐였겠지. 봄이 왔지만, 죽은 그 개구리에게 찾아온 봄은 아니었다. 개구리알은 말라가고 있었다.
봄은 오지만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봄이 누구에게나 다 찾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성미 급한 꽃망울들이 이미 터지려 하고 있었다. 다른 해보다 며칠 빠른 매화 소식이 매스컴을 타고 있다. 섬진강 주변 여러 곳에서 전해지는 매화 소식, 그 혹독했던 겨울을 떠올리면, 이처럼 이른 매화는 뜻밖이다. 우리 밭의 매화도 다른 해보다 훨씬 빠르게 봉오리가 부풀고 있는 듯하다.
그 망울을 보며 비로소 안도했다. 이제 그 추웠던 겨울도 끝나려는가 보다. 물론 꽃샘추위도, 3월의 폭설도 아직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3월은 매년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마음에 담기는 빛은 조금씩 다르다. 올해의 3월은 특히 오래 기다렸다. 겨울 내내 얼어붙은 대지처럼 나의 마음도 수축되어 있었던 탓일 게다. 그래서인지 작은 봉오리 하나가 부푸는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풀리고, 긴 기다림 끝에 문득 숨을 돌리는 듯한 위안을 느꼈다.
또한 3월은 늘 ‘새로움’을 약속하는 달이지만, 그 새로움이 언제나 기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개구리처럼, 어떤 생명은 봄을 맞이하지 못한다.
그 사실 앞에서 생의 변두리를 조용히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문득 내 자리 또한 다시 가다듬고 싶어진다. 아직 서늘한 바람이 스치지만, 그 바람 속에 숨은 미약한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기다리던 3월은 그렇게 나를 다시 걷게 한다. 조금 더 천천히, 그러나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따뜻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