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귀책사유 0%

자동 펌프 A/S 110725

by 로댄힐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를 돌아보면 종종 이런 말을 하게 된다.

“○○ 없이 그때 어떻게 살았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 없이도 잘 살았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 가운데 하나가 펌프다. 펌프 덕에 물을 쓰는 일이 얼마나 편한지 새삼 실감한다. 부산 집 근처 한일자동펌프 판매처를 찾아보니 김해가 가장 가까웠다. 김해에 들러 길뫼재 펌프를 구입해 설치했을 때 느꼈던 편리함은 지금도 또렷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맞으면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펌프 안의 마중물을 빼두지 않으면 얼어 터질 우려가 있는데, 두어 번 시도해 보다가 번거롭고 잘 되지 않아 그대로 두고 내려오곤 했다. 대신 헌 옷가지나 포대 등으로 감싸두었는데, 물은 얼었지만 다행히 펌프가 터지지는 않았다.


펌프 속 물을 간단히 빼는 방법은 겨울이 거의 끝난 뒤, 봄에서야 알게 되었다. 연결된 호스 중간을 분리하면 금세 물이 빠졌다. 시행착오 끝에 얻은 작은 깨달음, 이른바 ‘경험법칙’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펌프는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갔다. “펌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선풍기 없이 어찌 살았을까.” “예취기 없이?” “농막 출입문 앞 지붕 없이?”

○○ 없이, ○○ 없이, ○○ 없이. 삶은 늘 그렇게 지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펌프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잠갔다를 반복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기계치인 내 눈과 손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았다. 결국 하동읍에서 눈여겨본 모터 수리점에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모터를 떼어본 적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해본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이, 처음 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일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이용하는 사람이 버튼 하나 누르는 것도 어렵게 느끼듯이.

110725.jpg

그래도 용기를 냈다. 산기슭에서의 생활은 판단도, 실행도 스스로 해야 하는 삶이었다. ‘북 치고 장구 친다’라는 말이 이곳에서 터득한 생활의 또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모터는 생각보다 쉽게 떼어졌다. 다시 붙이는 일을 염두에 두고 분해 순서를 꼼꼼히 살펴두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신뢰를 주던 수리점 사장은 “A를 갈아야 한다”라고 했다. 팬(fan)이 얼어 있긴 하다며, 큰 파손은 없으니 그 부품만 교체하면 된다고 했다.


수리가 끝나고 그 자리에서 시험 가동을 하니 모터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가져와 제자리에 설치하니 수도를 틀면 물이 잘 나오고, 잠그면 모터가 멈추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작동했다.


하지만 다음 날, 수도를 잠갔는데도 모터가 멈추지 않았다. 자동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자 사장은 “○○를 떼어 이렇게 해보라”라고 설명했지만, 기계에 익숙지 않은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겨우 알아듣고 시도해보려 했지만, 이번엔 맞는 드라이버가 없었다. 다시 찾아갔고, 사장은 부속을 건네며 설치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또 맞는 드라이버가 없어 일주일 뒤 모터를 다시 떼어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해본 일이라 이번에는 훨씬 수월하게 떼어냈다.


그날 수리점은 몹시 붐비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이 모터를 아는지 직접 살펴보았고, 팬을 교체하고 다른 부속도 새로 갈아 끼웠다. 오전 내내 걸린 일이다. 하루를 온전히 바쳤지만 고마움이 앞섰다. 손봐준 분도, 사장도.


그러나 길뫼재로 돌아와 설치해 보니 자동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전화를 하니 사장의 말투에는 은근한 의심이 스쳤다. 어딘가에서 물이 새거나, 내가 조작을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눈치였다.


일주일 뒤, 편이 하동행 버스를 타고 오는 날이었다. 편은 “일을 그렇게 대충 넘길 게 아니다”라며 모터를 가지고 마중 나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여러 번 오가는 일에 지쳐 포기하려 했지만 결국 모터를 들고 갔다.


편의 버스가 도착하기 전, 일찍 수리점에 도착했다. 마침 한산한 시간이었다. 사장은 지난번 교체한 자동조절 기능 부품의 규격을 다시 확인하더니 “지난번에 잘못 끼웠다”라며 점원에게 다시 교체를 지시했다.


역시나.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귀책사유 0%.


새 부품을 끼우고 사장이 직접 시운전을 하니 자동 기능이 문제없이 작동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잘 되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방금 부품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지난번에 잘못 끼워준 부품을 오늘 올바른 규격으로 다시 교체했으니 정상화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장은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점원이 나서서 말했다.

“사장님, 방금 부품을 교체했습니다.”


그제야 사장이 상황을 이해했다. 오해가 풀리고 누명도 벗겨졌다. 아마 더위 때문이었거나, 사장의 머릿속이 여러 일로 복잡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결국 서로 웃으며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길뫼재로 돌아와 모터를 제자리에 앉히고 가동해 보니 펌프는 잘 돌아가고, 잘 멈추었다. 기능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처음엔 어색하던 탈부착도 어느새 능숙해졌다.


모터와 씨름하며 보낸 한 달, 그 4주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어느새, 여름은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황제의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