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 위로 바람이 먼저 올라왔다. 여린 가지들 사이로 연분홍이 얇게 번졌다. 닿으면 사라질 듯 가볍고, 멀어질수록 또렷해지는 빛이었다.
산제비 한 마리가 낮게 스쳤다. 연분홍 공기 위에 그은 선이 금세 지워졌다. 남은 것은 없었으나, 사라졌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은 흩어졌다가, 잠깐 머물다 내려앉았다. 닿기 전에 이미 사라지는 것들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방식으로.
산제비가 다시 낮게 날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느리게, 언덕의 가장자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그 작은 몸이 연분홍을 가르며 보이지 않는 두 지점을 잇는 듯했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무엇처럼.
그 사이에서 연분홍은 서서히 옅어졌다.
고개 너머, 댕기 머리 갑분이는 오래 기다렸다. 돈을 벌겠다며 먼바다로 큰 배 타고 떠난 석이를. 기다림은 계절을 건너 늙어 갔고, 끝내 더 먼 길로 먼저 떠났다. 석이가 떠나던 날, 갑분이는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었다.
산에 사는 제비나비, 산제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노랑나비와 흰나비만이 먼저 봄 무대에 올랐다. 그래서 아직, 이곳의 계절은 완전히 흘러가지 않았다. (봄날은 간다 1절 은유적 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