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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미움보다 오래 남는 감정

by 뇽쌤
SE-d87f6285-d104-4a81-a24b-16c14398da78.png?type=w773 할머니랑 같이 산 지 2년쯤 되었을 때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우리 집에 늘 계시던 할머니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할머니는 왜 우리 집에 계속 계시지?

생애 최초의 기억부터

할머니와 살고 있었지만

모두에게 그것이 당연한 건 아니었다는 걸

크면서 보고 들은 것이었다.

할머니에게는 살아있는 자식만

무려 여섯이나 있었는데,

하필이면 집안도 넉넉지 않은

넷째인 차남의 집에 계셨다.

나는 넉넉찮지만 자녀를 셋이나 낳은

그 차남의 막내딸이었다.

집안 내 가장 어린 막내는

원래 집안의 비밀이나 컴컴한 사실을

쉽게 주워 듣게 된다.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 앞에서는

어른들이 입을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부산에 계신 큰어머니와

소싯적에 대판 싸우시고

우리 곁으로 오게 되셨다든가,

그 당시의 그녀와 할머니의 레전드 발언 같은 건

아무리 어린 애라도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는 종류였다.

그렇게 얼렁뚱땅 우리 곁에 온 할머니는

막내(나)의 돌봄을 위해

계속 계시게 되었다고 알게 되었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어버이날이 되면

실제로 눈물을 짓던 대단한 효자(?)였기에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홀어머니와 설탕 국수를 먹었다는 아버지 이야기는

처음에는 애잔하지만

한 열 번쯤 듣게 되면 듣는 동시에 딴 생각도 할 수 있게 된다.

내 입장에서는

하품을 안 했던 게 효도였다.

뭐 어찌 되었든,

눈치 빠른 막내는

엄마와 할머니가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눈치를 챘다.

"니네 엄마는 애들은 두고

뭐하고 다니는 거냐."

"할머니는, 응?

니네 밥도 안 해주고

집에서 뭐 하신 거야."

그녀들은

서로에게 들렸으면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안 들렸으면 하는 건지,

헷갈리는 말을 자주 했다.

눈치껏 말을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녀들은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할머니가 안 계시면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존재 자체가

이 가정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되지만

상대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그렇게 미묘한 상태.

흰색이나 검은색이 아닌,

적당한 회색으로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그 시절부터 어렴풋하게 알았던 것 같다.

한 시도 곁에 어른이 없으면 안 되던 시절부터

술에 고주망태로 취해서

할머니 침대로 기어들어오던 시기까지

그녀들은 내 곁에 있었다.

가장 곁에서 오래 키웠던 손주인 내가

할머니에게 결혼을 할까 한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기 전까지 말이다.

그 이후로도 몇 달이나

할머니의 방은 역할을 잃은 채로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우리 집은

할머니가 혹시나 번호를 잊어버리고

집에 못 들어오실까

계속 열쇠로 현관문을 열곤 했었다.

먼 곳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번호키로 현관문이 바뀌어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비밀번호 뭐야?"

"1022"

"어, 그래? 전화번호 뒷자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무슨 번호야?"

"할머니 생신."

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던 손이 멈칫했다.

어떤 날짜는

누군가의 현관문을 여는 비밀번호로 영원히 남는다.

그날 아빠에게

나중에 할머니 생신으로

비밀번호를 정하자고 한 사람이 엄마였다고 들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효자 아빠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크고 나서

할머니가 큰집에 갔다가

괄시 비슷하게(...) 받았을 때도

씩씩거리면서 큰집에 전화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가 공부로 며칠을 집을 비웠을 때도

툴툴거리긴 했지만

우리 삼 남매를 돌봐준 사람도 할머니였다.

사랑이라고 쉽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

그렇다고 미움만으로 설명되는 관계도 아닌 감정들.

그런 울퉁불퉁한 마음들이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은 자국을 남긴다.

둘 사이에서

평생을 밀고 당기며 버텨낸 온기가

아직도 고향 집 현관문 비밀번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사람의 생애에 남아 있는 감정은

사랑 아니면 미움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과 미움이 얽힌 채 남겨둔 '자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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