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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쌤 Nov 15. 2023

교사는 의도가 있는 수업을 하는 사람


발령받던 첫해, 모든 선생님이 그러셨듯 저도 수업에 대한 의욕이 하늘을 찔렀었어요. 발령 첫해 3월에는 대학교에서 배웠던 교육과정 재구성을 밤새워서 짜기도 했어요. 초짜 눈에 잘 만든 것 같은 교육과정을 보고 신나하기도 했어요. 마침 6학급에 혁신학교라서 교육과정도 제 맘대로 짜고, 학년에 한 학급이다 보니 아무도 제 수업에 대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학급 운영이라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거구나, 아이들이 마냥 귀엽고 순하지는 않구나(여긴 정글이야.), 교육과정을 짜도, 수업을 열심히 준비해도 계획대로 안 될 때가 많구나, 하고 1학기 때 와장창 깨졌죠. 하하.



말 그대로, 와장창 머리 깨지고 피 터지는 1학기를 보내고, 저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가르치는 게 뭐가 중요해? 내가 뭐라고.
아이들이랑 새로운 경험하고 같이 '교실에서 사는 게' 중요하지. 
아이들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느끼는 게 있을 거야.



말 그대로 수업을 내려놓았죠. 이런 생각이 너무 심했던 시기에 저는 수업 목표를 아이들에게 안내하는 것도 약간 회의적이었어요. 수업 목표는 교사만 알고 수업하면 되는 거지, 그걸 왜 애들한테까지 얘기해?라는 생각이었죠. 수업보다는 아이들이랑 재미있게 '잘' 지내고 문제가 생기면 다 같이 해결하는 것에 더 몰두했었어요. 


옛날 옛적 감자심기

아이들이랑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같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걸 열심히 했어요. 시골학교다 보니 뒷산에 자주 올라가서 사계절의 변화 관찰하고 물가에서 가재 잡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농사짓기, 예산 따내서 박물관, 미술관 체험학습 하나라도 더 가기, 주변 요양원 정기 봉사하기, 요양원 방문 공연하기, 빙상장 자주 가기, 소소한 걸로 다 학급회의하기 등 여러 가지를 했었죠(저 활동들이 교사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것이라면, 당연히 너무 좋은 수업 활동입니다. 수업의 일환이니까요. 저는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막상 교실 안에서 하는 교과서와 함께 하는 수업들은 의미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주간학습안내장 내보내기 전에, 심하면 수업 전 날에 잡지 보듯이 교과서를 뒤적이다가 이거는 진짜 꼭 해야겠다, 싶은 것을 큰 계획 없이 아이들이랑 하기도 했어요. 


교과서가 거의 패션 잡지책이었죠. 그중에서 하나씩 골라잡아서 옷 입듯이 수업을 했으니까요. 아이들이랑 같이 하기로 한 것,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면 시간을 내야 하니까 덜 중요하다 싶은 건 다 쳐내고요.



그러니 주간학습안내장도 큰 의미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대강 내보내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었으니까요.



나는 성취기준을 적당히는 맞추고 있어. 그럼 그럴듯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거지. 



이렇게 스스로 변명하고 재미있는 일들과 아이들과 사는 것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지금도 제가 너무 존경하는 옆 반 선생님(지금은 교감선생님이셔요.)과 같이 얘기 나누다가 제가 그런 얘기도 했어요.



"저는 사실 수업이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애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고, 그게 다인 것 같아요.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던데요?"



선생님께서 제 말을 들어주시다가 말씀하셨어요.




음... 선생님, 그래도 교사는 결국에는 수업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바뀌게 된 계기는 우리 반 아이들 중 도시 쪽으로 학원을 가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어요. 그 당시 학교는 완전히 시골의 작은 혁신학교였는데, 2학기 중후반쯤부터 도시 쪽 학습 학원을 등록하시고 그쪽 학원으로 시내버스까지 타고 학원을 다니게 하시더라고요?



안 그래도 열몇 명 되는 우리 반 꼬마들 중에서 한 둘씩 학원 가는 애들이 생기면서, 저는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애들도 재미있었고, 나도 재미있었고, 

다 같이 재미있었는데? 

아이들은 3월보다 많이 자랐어...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

그런데 뭐가 문제지?



물론 아이들이 학원에 가는 것의 원인은 학교와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만은요, 그 당시 그 꼬마들은 정말 저한테만 1년 동안 배웠던 환경이었거든요.



그리고 그즈음에 저는 여러 활동들을 끝내면서 도대체 애들한테 뭐가 남은 거지? 추억?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옆 반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제 이야기를 들으셨던 선생님께서 그 '재미있는 일들'을 무슨 배움을 위해서 했냐고, 얼마나 교육과정으로 조직되었고 수업들로 촘촘하게 연결되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원래 말하는 직업이니까 옆 반 선생님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그럴듯하게 얘기는 했는데, 말하면서 얼굴이 점점 빨개졌어요. 



제 스스로는 알았거든요. 내가 지금 입으로 떠들고 있는 목표들, 교육과정과 수업으로 연결했다고 하는 것들이 다 지어낸 소리며 개소리고, 사실은 그냥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했고 재미있어서 했고, 그 결정에는 교사로서의 치밀한 생각은 없었다는걸요.



그 이후부터는 아이들이랑 예전과 비슷하게 지내면서도 계속해서 그 경험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어요. 



학급과 학교의 여러 상황들로 당연히 모든 수업을 의도에 따라 치밀하게 설계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을 때, 하려고 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했죠.



이 활동을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닌가?

내가 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거야?

이 수업을 하고 나서 뭐가 바뀌길 기대하는 거지?



아무리 좋은 자료, 멋져 보이는 활동, 재미있어 보이는 활동이 있어도 한 번 더 내 의도와 맞는지 생각하고 할지 말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다른 선생님께서 같이 하자고 말씀하셔도 내 의도랑 안 맞으면 예의 있게 거절하기도 하고요.



그다음 해부터는 대략적이라도 교육과정을 큰 기반을 세워두고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식으로 1년을 지냈던 것 같고요. 



교사로서 운이 좋기도 했지만, 제가 제일 자랑스러우면서도 좋았던 점은 지금까지의 교직경력 동안 교육과정을 내 손으로 안 짠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제출하기 전까지 힘들고 이지에듀의 힘을 빌렸지만 내 교육과정이잖아요! ㅎ_ㅎ (물론 잘 짠 게 절대 아니에요. 교사로서의 제 의도가 잔뜩 들어간 제멋대로 교육과정이에요. 윗선에서 다시 제출하라는 얘기 많이 듣습니다.ㅎㅎ)



그래도 그때의 그 창피했던 생각들은 여전히 제 얼굴을 뜨겁게 만들어요. 



실제로 아이들이랑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1년을 지내다 보면 생활지도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예 수업도 안 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준비가 안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을 준비해도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학교는 어떤가요? 수업 준비하라면서 업무는 잔뜩 있고, 이상한 의무 연수들은 많고 4시 반까지 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직업은 수업하는 사람이야,라는 것은 놓지 말아야 하는 것 같아요.  내 수업을 놓지 말아야 하고, 이 수업을 왜 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수업이니까요. 본질이 흔들리면, 교사로서의 나도 희미해지고, 여러 상황의 회오리 속에서 쓸려내려가기 쉽더라고요. 



누군가 초등 교사를 단순한 공무원으로 여긴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고 나는 수업을 하는 전문 공무원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 설득이 돼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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