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받던 첫해, 모든 선생님이 그러셨듯 저도 수업에 대한 의욕이 하늘을 찔렀었어요. 발령 첫해 3월에는 대학교에서 배웠던 교육과정 재구성을 밤새워서 짜기도 했어요. 초짜 눈에 잘 만든 것 같은 교육과정을 보고 신나하기도 했어요. 마침 6학급에 혁신학교라서 교육과정도 제 맘대로 짜고, 학년에 한 학급이다 보니 아무도 제 수업에 대해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학급 운영이라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거구나, 아이들이 마냥 귀엽고 순하지는 않구나(여긴 정글이야.), 교육과정을 짜도, 수업을 열심히 준비해도 계획대로 안 될 때가 많구나, 하고 1학기 때 와장창 깨졌죠. 하하.
말 그대로, 와장창 머리 깨지고 피 터지는 1학기를 보내고, 저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가르치는 게 뭐가 중요해? 내가 뭐라고.
아이들이랑 새로운 경험하고 같이 '교실에서 사는 게' 중요하지.
아이들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느끼는 게 있을 거야.
말 그대로 수업을 내려놓았죠. 이런 생각이 너무 심했던 시기에 저는 수업 목표를 아이들에게 안내하는 것도 약간 회의적이었어요. 수업 목표는 교사만 알고 수업하면 되는 거지, 그걸 왜 애들한테까지 얘기해?라는 생각이었죠. 수업보다는 아이들이랑 재미있게 '잘' 지내고 문제가 생기면 다 같이 해결하는 것에 더 몰두했었어요.
아이들이랑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같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걸 열심히 했어요. 시골학교다 보니 뒷산에 자주 올라가서 사계절의 변화 관찰하고 물가에서 가재 잡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농사짓기, 예산 따내서 박물관, 미술관 체험학습 하나라도 더 가기, 주변 요양원 정기 봉사하기, 요양원 방문 공연하기, 빙상장 자주 가기, 소소한 걸로 다 학급회의하기 등 여러 가지를 했었죠(저 활동들이 교사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것이라면, 당연히 너무 좋은 수업 활동입니다. 수업의 일환이니까요. 저는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막상 교실 안에서 하는 교과서와 함께 하는 수업들은 의미 없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주간학습안내장 내보내기 전에, 심하면 수업 전 날에 잡지 보듯이 교과서를 뒤적이다가 이거는 진짜 꼭 해야겠다, 싶은 것을 큰 계획 없이 아이들이랑 하기도 했어요.
교과서가 거의 패션 잡지책이었죠. 그중에서 하나씩 골라잡아서 옷 입듯이 수업을 했으니까요. 아이들이랑 같이 하기로 한 것,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면 시간을 내야 하니까 덜 중요하다 싶은 건 다 쳐내고요.
그러니 주간학습안내장도 큰 의미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대강 내보내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었으니까요.
나는 성취기준을 적당히는 맞추고 있어. 그럼 그럴듯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거지.
이렇게 스스로 변명하고 재미있는 일들과 아이들과 사는 것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지금도 제가 너무 존경하는 옆 반 선생님(지금은 교감선생님이셔요.)과 같이 얘기 나누다가 제가 그런 얘기도 했어요.
"저는 사실 수업이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애들이랑 같이 지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고, 그게 다인 것 같아요. 그게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되던데요?"
선생님께서 제 말을 들어주시다가 말씀하셨어요.
음... 선생님, 그래도 교사는 결국에는 수업으로 말하는 사람이잖아.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바뀌게 된 계기는 우리 반 아이들 중 도시 쪽으로 학원을 가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어요. 그 당시 학교는 완전히 시골의 작은 혁신학교였는데, 2학기 중후반쯤부터 도시 쪽 학습 학원을 등록하시고 그쪽 학원으로 시내버스까지 타고 학원을 다니게 하시더라고요?
안 그래도 열몇 명 되는 우리 반 꼬마들 중에서 한 둘씩 학원 가는 애들이 생기면서, 저는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애들도 재미있었고, 나도 재미있었고,
다 같이 재미있었는데?
아이들은 3월보다 많이 자랐어...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
그런데 뭐가 문제지?
물론 아이들이 학원에 가는 것의 원인은 학교와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만은요, 그 당시 그 꼬마들은 정말 저한테만 1년 동안 배웠던 환경이었거든요.
그리고 그즈음에 저는 여러 활동들을 끝내면서 도대체 애들한테 뭐가 남은 거지? 추억?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옆 반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제 이야기를 들으셨던 선생님께서 그 '재미있는 일들'을 무슨 배움을 위해서 했냐고, 얼마나 교육과정으로 조직되었고 수업들로 촘촘하게 연결되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원래 말하는 직업이니까 옆 반 선생님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그럴듯하게 얘기는 했는데, 말하면서 얼굴이 점점 빨개졌어요.
제 스스로는 알았거든요. 내가 지금 입으로 떠들고 있는 목표들, 교육과정과 수업으로 연결했다고 하는 것들이 다 지어낸 소리며 개소리고, 사실은 그냥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서 했고 재미있어서 했고, 그 결정에는 교사로서의 치밀한 생각은 없었다는걸요.
그 이후부터는 아이들이랑 예전과 비슷하게 지내면서도 계속해서 그 경험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어요.
학급과 학교의 여러 상황들로 당연히 모든 수업을 의도에 따라 치밀하게 설계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을 때, 하려고 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했죠.
이 활동을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닌가?
내가 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거야?
이 수업을 하고 나서 뭐가 바뀌길 기대하는 거지?
아무리 좋은 자료, 멋져 보이는 활동, 재미있어 보이는 활동이 있어도 한 번 더 내 의도와 맞는지 생각하고 할지 말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다른 선생님께서 같이 하자고 말씀하셔도 내 의도랑 안 맞으면 예의 있게 거절하기도 하고요.
그다음 해부터는 대략적이라도 교육과정을 큰 기반을 세워두고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식으로 1년을 지냈던 것 같고요.
교사로서 운이 좋기도 했지만, 제가 제일 자랑스러우면서도 좋았던 점은 지금까지의 교직경력 동안 교육과정을 내 손으로 안 짠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제출하기 전까지 힘들고 이지에듀의 힘을 빌렸지만 내 교육과정이잖아요! ㅎ_ㅎ (물론 잘 짠 게 절대 아니에요. 교사로서의 제 의도가 잔뜩 들어간 제멋대로 교육과정이에요. 윗선에서 다시 제출하라는 얘기 많이 듣습니다.ㅎㅎ)
그래도 그때의 그 창피했던 생각들은 여전히 제 얼굴을 뜨겁게 만들어요.
실제로 아이들이랑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1년을 지내다 보면 생활지도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예 수업도 안 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준비가 안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을 준비해도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학교는 어떤가요? 수업 준비하라면서 업무는 잔뜩 있고, 이상한 의무 연수들은 많고 4시 반까지 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직업은 수업하는 사람이야,라는 것은 놓지 말아야 하는 것 같아요. 내 수업을 놓지 말아야 하고, 이 수업을 왜 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교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수업이니까요. 본질이 흔들리면, 교사로서의 나도 희미해지고, 여러 상황의 회오리 속에서 쓸려내려가기 쉽더라고요.
누군가 초등 교사를 단순한 공무원으로 여긴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고 나는 수업을 하는 전문 공무원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 설득이 돼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