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 3을 보고 나는 이 영화에 푹 빠졌었다.
마 형사, 이준혁 배우가 연기한 주성철, 핵심 포인트 초롱이까지.
너무 재미있게 보고 오고 며칠 동안 영화에 대한 정보나 인터뷰들을 찾아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사고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내가 보고 있는 매체들을 그냥 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내 생각들을 뻗어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영화를 보면서 '초등 교사'인 내 입장에서 범죄도시 3이라는 영화를 생각해 봤다.
마 형사는 강력하다.
그의 앞에 서면 누구든지 말을 잘 듣는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던 사람이라도, 범죄를 저지르던 질 나쁜 인물이라고 해도, 진실의 방이나 잠시의 틈(주먹을 날리는)만 주어진다면 어느새 고분고분 해져서 그의 말을 따른다.
그게 설사 본인이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나 말이어도, 마 형사의 주먹 앞에서는 얌전해 행하게 된다. 거의 마법이나 다름없다.
또한 마 형사는 진짜로 흉악한 빌런들(장첸, 강해상, 주성철, 리키와 같은)을 관객들의 마음이 시원해질 수 있도록 흠씬 두드려 패준다. 영화 속에서는 복싱 기술로 쉴 새 없이 맞을 뿐 아니라, 캐비닛에도 처박힐 정도로 인간이 구겨지는데(?), 그 과정에서의 관객들이 가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인간의 역사 중에서 지금 현재가 인간의 역사상 기술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고도화된 사회이지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여전히 악한 사람들을 '마 형사'라는 공권력이 주먹으로서 악인들을 벌하고(실제 공권력 행사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질 나쁜 인물들을 주먹으로서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스토리에 열광했다.
이는 범죄 도시 시리즈가 그동안 1000만을 가뿐히 넘기고, 현재 범죄도시 3은 곧 관객 수 천만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실제 삶에서도 이어진다. 최근 뉴스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만, 사적 복수가 횡횡하고, 법적 처벌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서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이 앞장서서 개인의 신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어 그것이 분노로 이어지는 것인데, 사람들은 더 이상 분노와 응분을 소극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모두 드러낸다.
잘못한 사람은 완전히 아웃이고, 사형을 시켜야 하며, 그 사람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어찌 보면 밟아준다.
나는 사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만약에 당하거나 내 가족들이 당한다면 그보다 더 분노할 거야.'라고 확신한다. 내 일이 아니니 어찌 보면 속 편하게 이런 소리나 하고 있겠지만, 또 나의 다른 자아인 교사로서의 나는 사회에서 애들을 사회화시키며 가르치고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입장이고, 그 분위기가 그대로 학교 현장으로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더 이상 조금도 참지 않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내켜하지 않는 사람들, 욱하는 사람들.
또한 아이들은 원래 어른들보다 참지 못하지만, 그 반응이 이전의 세대 아이들보다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아이들 간의 다툼이 생길 때 상대방 아이는 교사가 엄하게 가르치며 나름대로의 응징해 주기를 바라고, 내 아이의 이야기는 따뜻함과 이해심으로 들어주기를 바라는 그 양가감정 속의 학부모를 마주하게 된다.
나도 아이가 있다 보니, 그건 본능적이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이 아이도, 저 아이도 다 내 제자이고, 담임교사인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어른으로서의 따뜻함과 이해심으로 우리 반 모두를 대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는 사람인 것을 서로가 모두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바로, 곧, 잘 말을 듣지 않지만, 계속되면 그 안에서 분명한 변화는 보인다. 한 번에 말을 너무 잘 들으면 그것도 이상하다.
또 담임교사로 있다 보면 아이들을 가정에서 가르치면서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는 경우를 마주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담임교사인 내가 알게 되면 당연하게도 100프로 아동학대로 상사에게 보고하고 신고한다.
내가 의무적으로 아동학대 신고를 해야 하는 직업군을 가지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초등 교사가 아이들의 초등 생활 동안 부모 이외의 아이를 가장 가까이서 살필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사로서의 사회적 위치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알량한 공직 마인드를 가진 개인이지만, 교사로서의 나는 그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사회 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면 아무도 모른다,라는 생각이랄까.
이는 내 경험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어릴 적에도 엄한 아버지 앞에서 생각 없이 욕을 했다가 뺨을 여러 대 맞으면서 자랐고(물론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다, 지금도)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당구 큐대로 맞아가며 자랐지만, 그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선연하게 남아있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릴 적 나는 맞아야지만 욕을 하지 않았고, 맞아야지만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 굉장히 훌륭하게 자랐는가?
가지 않은 길이고, 대부분 그랬었던 시대 상황이라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든 아이들이 맞지 않고도 아이들이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나 자신을 유지한 채로 사회화되어서 인간들이 모여있는 사회에서 마음 편하게, 또는 적당히 불편해하기도 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예전에 아동학대 신고를 했다가, 두려움에 떠는 꼬마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어린아이들은 상황이 심각해지면 자기가 잘못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짓말이었다고 말을 반전시키는데, 그걸 보는 건 너무 마음이 아픈 일이다.).
선생님도 어릴 때 아빠한테 많이 맞았거든. 근데 그때 너무 속상했어. 그래서 누구든 주변에서 선생님 아빠를 말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선생님이 **이 엄마 아빠를 말려주는 거야, 그러면 안 돼요. 우리 **이 때리지 마세요,라고.
심각한 학대가 아니라면 아동과 부모를 분리시키지 않고, 아이는 다시 가정에서 자라게 된다. 나는 그때 곁에서 말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나도 너무 말 안 듣고 까불거리는 꼬마를 보고 뒤통수 한 번 탁! 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있다(생각만! 결코 때린 적은 없음!).
마 형사는 성인의 범죄자들을 체포하며 일반인을 보호하고, 나는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영화를 보며 대입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만, '영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라는 작업 속에서 나는 이 질문만 생각이 났다.
인간은 맞지 않고도 사회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맞지 않고도 사회화될 수 있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 폭력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면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들을 복종시킨 것이 정의라고 주장될 수 없다는 파스칼의 말이 떠오른다. 성인도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심한 말썽꾸러기와 금쪽이를 우리 반에서 만나더라도, 우리 집 꼬마가 심하게 말을 안 듣는다고 해도, 나는 어른이니까 당연히 기다려줄 수 있기를. 오은영 박사님은 어른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어린아이는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는 것과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기다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아주아주 말도 안 듣고,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무례한 어린이라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살핌과 이해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누구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