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수가 늘어나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내 글을 읽어주고, 내 글에 공감해 주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조회수와 좋아요가 이웃 수랑 같지 않아도
소리 없이 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존재한다.
감사한 일이다.
처음에 책을 낼 때, 판매지수를 매일 확인하며 위경련을 얻었다. 확인 자체가 스트레스이자 그때는 공포였다.
(무지하게 도전한 책 출판이었다. 표지에 내 얼굴을 대왕만 하게 찍어낸 출판사가 무조건 맞는 줄 알고 한 마디 못했었다. )
두 번째 책을 낼 때는 판매지수 확인보다는 어떤 분들이 내 책을 읽어줄까 궁금해하며 밤잠을 설쳤다.
스피치를 가르치며 전했던, 즉 스피치에 관한 이야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았다. 관심 있는 사람도 있지만 스피치에 1도 관심 없는 사람도 존재하니까.
(이때는 불면증 때문에 고생했었다.)
책이 많이 판매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 책은 처음 책 보다 내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고 내용면에서도 공들여 스스로 만족했다.
그런데 사실 읽어주는 사람이 많아야 그 가치가 인정되는 법이다. 읽어주지 않는 글은 멈춰진 생명이다.
누군가 글을 읽어줄 때 비로소 활자는 작가의 의도대로 팔딱거리며 독자의 마음에 다가가 점 하나를 찍는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난 아직 어느 정도 고집스럽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조금 재미없고 조금 올드하고 조금 고루한 느낌이 드는 생각이라도 하고 싶으면 글로 남긴다.
소설은 그런 면에서 제약이 덜하다.
목차를 나눠 주제를 분명히 하지 않아도 전체 흐름을 잘 연결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등장인물을 통해 뻔뻔하게 해낼 수도 있다.
육아서를 거쳐 자기 계발서 에세이를 거쳐 소설을 쓰는 나는 늘 나의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내 모습과 내 글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좋다." 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나도 좋은 생각, 좋은 글을 많이 기록해야 한다.)
나는 실행하며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불완전하게 시작해 - 불완전하게 끝날 때도 많다. 치밀하게 계획하기보다 대략적으로 구상하고
일단 해본다.
해보면 아하! 이해되는 것도, 생각처럼 안 풀리는 것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생각을 죽이지 않고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공모전에 글을 내면서 처음으로 챗 gpt에게 글을 분석하고 공모전 수상 여부를 분석하라고 했다.
수상 가능성이 아주 높고 구도와 인물 구성이 완벽하다고 다양한 칭찬을 쏟아낸다.
그 gpt 말대로라면.. 대상이다.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당장 이렇다 한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주눅 들 필요 없다. 꾸준히 무언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의 인생의 불씨는 꺼질 수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