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누구나 자신의 가치관과 경험을 글에 녹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주류, 음악, 패션, 공간, 물건, 사람, 사랑, 상처, 트라우마 등등..
작가는 문장 곳곳에 이러한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단어들을 숨겨놓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특정 이름이 거론되거나, 장소, 예술작품이 언급되는 순간 추측을 시작한다.
' 이 작가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 이유 '
' 미술관과 예술작품이 스토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
' 등장인물이 마시는 술의 종류와 묘사한 부분'
' 여행 직후 나라에서 느꼈던 감정의 디테일함.'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이건 직접 경험하고, 직접 좋아해 경험해 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감한다.
어깨너머로 배울 수도 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로 찬사를 받지 않는가. 작가의 이야기와 작가가 그리는 상상 속 이야기가 만나 결국 하나의 역사로 자리 잡았다.
그런 면에서 각자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역사이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일화, 나의 소소한 취미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글로 정리되어 기록되는 순간
더불어 차곡차곡 정리되는 순간 이는 결국 문장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비포 선라이즈, 대상을 받은 내 첫 소설 제목이다.
이 소설 속에는 내가 대학생 때 거닐던 대학로 거리가 스며들어있고, 술을 과하게 마셔 오바이트하던 적나라함이 고스란히 묘사됐다. 그 당시 읽고 있던 소설책도 그대로 문장에서 발견했다. 이것은 상을 받은 후 다시 읽으며 깨달은 것이다. 연애를 했을 때 사용하던 단어나, 화장법 등 나만 아는 디테일들이 곳곳에서 다시 태어나 글을 쓰는 순간 나를 잠시 20대 초반의 지은이로 데려다 놓기도 했다.
소설을 심사해 주신 교수님들은 그때 내 작품의 스토리가 탄탄하고 다양한 묘사와 표현이 적절하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이는 내 경험으로 더 생생하게 표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는 읽으며 상상하는 사람이, 읽으며 상상만 하는 사람보다는 직접 경험하기 위해 발로 뛰는 사람이 생생하게 쓸 수 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쓴 김금희 작가는 정말 식물을 사랑한다. 책에서 식물에 대한 정보와 애정이 곳곳에 드러난다.
김훈 작가는 자전거를 사랑한다. 그래서 결국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며 전국 산천을 누비는 자전거 여행을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는 작가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하루키처럼 달리며, 팔 굽혀펴기며, 윗몸일으키기며 물구나무를 서며 운동을 한다.
결국 글 속에 작가의 경험이 어쩔 수 없이 들어가고, 잘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글에 스피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단어 / 발음 / 속도 / 발성 / 면접 / 스피치'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거나
내가 좋아하는 바다가 있는 도시 부산, 속초, 울산 등등등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내가 글로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고 직접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이니 누구보다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에게 얼마나 희망적인가.
첫 문장 한 줄이 고민스러워 끙끙거려지는 날이라면 이런 나의 경험들을 과감하게 떠올려야 한다.
멍청하고, 유치하고, 너무 남우세스러워 보여도 상관없다. 그 첫 문장을 시작으로 우린 다시 차분하게 뒤 문장을 한 줄 한 줄 누구보다 씩씩하게 채워나갈 수 있다.
누군가의 멋진 인생보다, 내가 겪은 좌충우돌 우스운 인생 한 꼭지가 더 깊이 있는 글을 만든다.
나는 좀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길치인데 특히나 주차장에서 길을 찾아야 할 때 '여기가 어디지' 생각을 자주 한다.
공간감각도 좀 부족한 것 같다. 오늘 반대 방향에서 버스를 타서 결국 서울역까지 다녀올 뻔했던 (똥멍청이)짓을 했다.
여기서 오는 504번과 저기서 오는 504번의 방향을 왜 생각하지 않고 버스가 보이면 무작정 타는 것일까.
버스에서 문득 504번 버스를 타고 대학교에 가던 길이 떠올랐다.( 왜 이걸 헷갈렸지.. 더워서일 거야.. 생각하면서)
그리고 순간 쓰던 소설 꼭지에 버스를 잘못 타 계획이 뒤엉켜버린 주인공의 사건 하나를 넣으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 쓸 수 있다. 헷갈려하고, 헤매다 고생스러운 결말을 맞이하는 길 찾기 고행은.
나의 경험, 나의 기억, 나의 상처와 나의 행복 모두가 글감이 될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사실 세상에서 가장 생생하고 멋진 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