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미친년이라 불렀다
그날, 동서 주희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왔다.
평온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에게 가족 중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명품 가방을 쇼파 위에 얌전히 내려놓고,
턱을 쳐들어 눈은 천장 이곳저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미소 지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왜 떠났는지,
돈은 어디로 갔는지 감히 묻지 않았다.
그 집안에서 ‘1억’쯤은 바람 한 점처럼 스쳐 지나가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 갇힌 경이 마음은 결코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남편은 엄지발톱이 날아갔고, 주경야독하며 준비했던 주택관리사 시험도 포기했다.
경이는 주희를 보면 언제나 과거가 먼저 떠오른다.
야단맞고 다음을 대비했던 나날들...
주희의 태연스런 태도와 미소는 경이를 과거의 한 장면으로 데려갔다.
인서가 고3이 되던 해, 석훈은 새 사업을 위해 해외로 떠나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의 상황이 경이 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인서의 고3은 상대적으로 큰 부담이 아니었다.
그 무렵, 주희는 경이 에게 말했다.
“동서 우리 집에 굉장히 훌륭한 차 선생님 오셔 꼭 와! 안 오면 평생 후회할 거야”
입이 닿도록 차 선생을 홍보하며 경이를 끌어들였다.
주체성을 상실한 경이는 거절할 수 없었다.
“예‘ 하고 목소리만 겨우 내었다.
경이와 석훈 이들 부부는 딱 맞는 부부였다.
주희가 그리는 세계를 경이는 알지 못했고 넘어설 수 없는 애송이들이었다.
결국 차 선생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직도 이 인물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역술가인지, 철학가인지, 무당인지 알 수 없는 차 선생은 주희 집안의 가운과 운명을 심지어 주식까지 점쳐준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경이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했으니,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첫 명절과 제사, 고추가루 사건 등 이미 형성된
트라우마는 경이가 거절할 용기조차 잃게 만들었다.
이른아침부터 서둘러 주희집으로 갔다.
주희집에 온다던 차선생은 그곳에 없었다.
차 선생은 주희 집이 아닌 그의 형제집, 송담동 90평대 고급 빌라에 있었다.
주희와 석철 경이는 송담동으로 이동했다.
경이는 처음 보는 고급 가구와 향과 세심하게 배치된 조명과 정교한 인테리어에 압도당했다.
입구 전실만 해도 경이 집 거실만 했다.
벽에 걸린 그림들, 콘솔 위 아기자기한 도자기 소품, 향이 배인 향초와 촛대, 크리스탈 조명과, 감각적인 벽지까지 마치 전시장을 서성이듯 눈에 담았다.
중문 너머 거실에서는 목소리들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흘렀다.
자부심이 깃든 명령조의 차 선생,
고분고분 굴러가는 듯한 주희의 목소리,
두세 옥타브 높아졌다 낮아졌다하는 석철의 활기찬 질문. 경이는 문턱에 서 있는 손님일 뿐이었다.
" 동서 이제 네 차례야"
주희의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궁금하세요?”
경이가 할 말은 단 하나였다.
“전 아이들 아빠 사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차 선생은 경이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니, 아이가 고3인데 대학 문제를 제치고 남편 사업을 묻습니까. 이런 분은 상담하면서 처음 보내.”
주희가 슬쩍 끼어들며 웃었다.
“아유 선생님, 우리 동서가 좀 특이해요.”
그리고 경이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너 좀 특이하잖아.”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고3 수험생이 있는 집은, 역술가 앞에서도 야단을 맞아야 했다.
경이가 '미친년' 인게 분명했다.
결국 인서와 인후의 생년월일까지 알려야 했다.
차 선생은 마치 학자가 진리를 말하듯 당당하게 아이들의 순탄치 않을 미래를 예견했다.
‘헉’- 숨이 막혔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경이 속에서 익숙한 무력감이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높은 상담료가 요구되었다.
경이 손끝에 느껴지는 무게보다, 통제당하는 감각과 불안이 더 선명히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이 이 체계 속에 포획되어 있다는 느낌이 남았다.
입술 위로 또 떠오른 단어 하나. “미친년.”
왜 또 여기서 이 이름을 부르게 되었는지,
경이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상담을 마치고 귀가하려던 경이는 그 순간 주희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동서 놀이터 앞 카페야, 같이가자 ”
경이는 다시 이동했다.
카페 안, 주희는 두 명의 고급스런 중년 여성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미세스 박, 미세스 김이라 부르며 경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를 섞어 대화했다.
아마도 경이를 위한 배려였으리라.
“어머 럭셔리해요. 사모님”
주희의 물방울 목소리가 카페 안을 채웠다.
“자긴 정말 초이스를 잘 하는거 같아”
“ 오- 리얼리”
경이는 그들앞에 다가가 상견례장에서 사돈을 뵙듯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엄지손톱만 한 투명한 보석이 한 분의 목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빛나는 보석 사모님이 턱을 치켜든 채 경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시선 속에서 경이는 자신이 얼마나 작고 조심스러운 존재인지 실감했다.
인사를 마치자 주희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호호, 사모님 오늘은 우리 동서가 커피 산다고 했어요. 그치, 동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끼야토는 건강에 안좋아 따뜻하게...”
주희의 호들갑이 이어졌다.
경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이 체계 속에 끌려가고 있다는 감각만 선명히 느꼈다.
“미친년.”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 떠올랐다.
"You stupid little bitch!"
경이도 그녀들이 쓰는 영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무거운 공기처럼 경이 안에 내려앉았다.
자신이 끌려가는 감각, 그 무력한 끌림이, 경이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던 날들.
천지분간을 못한 어리석음의 총체였다.
경이는 오래도록 뒤에서 입방아에 올랐던 자신을 떠올렸다.
노동과 검소함이 누구에게는 가십일 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진실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건네야 한다는 것도 이제서야 알았다.
그 무력감과 억울함 속에서 경이는 스스로를 '미친년'이라 이름 붙였다.
경이는 그들을 위해 했던 노력과 선택이 단 한번이라도 ‘값진 것’이었던 적이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한 그들을 위한 선택의 흔적은 아직 서랍 한 켠에 남아 있다.
주희는 제사를 핑계 삼아 자연스레 들어왔다.
큰손 주희와 호구 경이는 질서 있게 제사상 앞에
나란히 섰다.
말 없는 구도는 탁자 위 반찬처럼 가지런했다.
주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은 무례도 호의도 아닌,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