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락된 숙제를 한 듯

by 지오쌤

** 연재 날짜를 지키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가벼운 충돌 사고로 그동안 병원에 있다 나왔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호구 경이가 주희네 집에서 제사상 앞에 나란히 섰던 날

남편은 건강검진을 받고 ‘재검 통지서’를 받았다.

폐에서 이상 소견이 나왔다.

석철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 김 과장, 폐암 걸려서 석 달 만에 죽었어. 조심해.”

영혼이 스미지 않은 석철의 혀는 자유로웠다.

그 자유가 누군가의 마음을 베어도, 그는 몰랐다.

순간 경이는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은 말을 참 모양 없이 하네.”


그건, 석훈이 경이 앞에서 형에 대해 처음 말한 불만이었다.

며칠 뒤 남편은 비소세포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직업상 매년 받던 건강검진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던 몸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오진이라 믿었다.

그러나 믿고 싶었던 마음 자체가 오진이었다.

검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혈액 수치, 심전도, 혈압, 당수치- 정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장에도 이상이 있어 수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소견까지 나왔다.

검사를 받는 동안, 석철에게서 몇 차례 전화가 왔다.

“수술은 언제야?”

“어디 병원이야?”

질문한 만큼 반복해서 답했다.

S 병원, 수술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다.

입원해 있는 동안, 언니와 형부, 동생과 조카들이 다녀갔다.


지하철로 한 번에 올 수 있는 거리,

1시간도 걸리지 않는 병실,

남편은 누구보다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 하나뿐인 형. 아버지처럼 받들던 사람.

어린 시절, 그의 그림자를 좇다 다친 무릎보다

그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던 사람이었다.

형과 조카의 싸움에 방패가 되겠다며 기꺼이 발톱을 희사했던 남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내던져진 듯했다.

2017년 1월 23일 아침 일곱 시,

석훈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졸업 전 입사한 인후가 출근 전 아빠를 보러 병실에 왔다.

눈물을 글썽이며 딸이 경이를 안아주었다.

작은언니 내외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경이와 함께 있었다.

수술 시간 동안 경이는 병원 내 성당과 수술실 주변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뻔뻔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었다.

수술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광판이 먼저 알려주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던 시간 바람은 찼지만 하늘은 맑았다.

경이는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안도했다.

그러나 이 공간 어디에도 그의 형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수술실 앞에도, 회복실 복도에도, 병원 어디에도

석훈이 가장 기다리던 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예정된 자리에 아무도 오지 않은 연극처럼.

무대도, 조명도 있었지만 정작 출연자만 비어 있는 날이었다.

설 연휴를 병원에서 지냈다.

결혼 첫 설날만큼이나 이들 부부에게 기억에 남는 명절이 되었다.

한겨울, 1주일 넘게 이어진 병원 생활과 수술, 설 명절이 정리되었다.


퇴원하는 날, 오매불망 기다리던 석훈의 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숙제처럼 들고 온 흰 봉투 하나가 탁자 위에 놓였다.


만약 수술하던 날 “잘될 거야, 형이 기도할게”라는

사람이 사람을 걱정할 때 건네는 그 정직한 말과

그 따뜻한 온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면,

찢어진 그의 육신은 조금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었을까.

'암은 사랑받기 위해 생긴 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경이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해왔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 지우지 못한 단어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개자식!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주희가 1억을 들고나간 일이 그렇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면,

왜 정작 그의 동생은 단 한 번도 형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칼날 아래 누워야 했을까.

경이는 묵묵히 자신에게 물었다.

오래 감춰둔 쓰디쓴 울분이 미세한 균열처럼 퍼져 나왔다.

더 이상 눌러놓을 수 없던 감정의 조각들이

한 장 한 장, 봉투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졌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었다.


말하지 않는 사람,

그 침묵을 대신 짊어진 사람, 경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더 깊이 가라앉았다.

혈연도, 가족도 관계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가족이면서도 끝내 연결을 거부하는 관계.

누군가는 그것을 ‘인연의 오류’라 불렀다.

경이는 그 말 앞에 오래 머물렀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