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혹은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

나 같은 놈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by 지오쌤

며칠 뒤 석훈에게 연락이 왔다.

형이 요양병원에 다녀갔다고 했다.

조카 결혼식에 보낸 축의금 백만 원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아이쿠, 99만 9천 원만드릴걸. 그럼 우리가 천 원은 남았을 텐데.”

경이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석훈은 웃지 않았다.


그날 석철은 석훈을 데리고, 병원 근처 외부 식당으로 향했다.

밥 한 끼를 나누고 형은 돌아갔다.

그 이후 석철은 다시 병원에 오지 않았다.

석철의 집에서 두 시간 남짓 달리면 닿는 거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리는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경이는 그 사실을 애써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섭섭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주희가 집을 나갔을 때, 석훈은 형을 위로하겠다며

두 시간 거리 형의 집으로 거의 매일 출퇴근했다.

인생을 건 중요한 시험을 포기하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서도 형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썼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본 경이로서는

석철이 한 번쯤 더 석훈을 찾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석훈은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요양병원에서 매일 산보, 족욕, 비파 호흡, 온열치료

자닥신과 비타민 주사 등을 받으며 체력을 회복해 갔다.

항암을 받은 다음 날이면 밥은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

새벽마다 속을 게워내느라 세 번쯤 토하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경이는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했다. 남편이 없는 집안은 공기마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말이면 경이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그 병실은 항상 조용했다.

남편 외에도 세 명의 환자가 있었다.

이름은 잊혔지만, 표정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아내가 매일 찾아왔고, 누군가는 가족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 여섯 달 동안, 그는 밖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냈다.

그 시절의 다이어리만이 지금은 그의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다.

6개월 후, 그는 퇴원하자마자 다시 일터로 나갔다.

블루칼라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 시절,

그를 처음 선택해 준 소장님이 그를 다시 불러 주었다.

쉬는 날, 침대에 누워 있던 남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같은 놈은…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경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팠다.

사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결혼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결혼을 부추긴 가족들까지 저주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날 이후, 남편은 석철과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했다.

명절에도, 제사에도 더는 큰집에 가지 않았다.

그가 형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경이는 그 속에 분노와 슬픔, 오래된 배신감이 섞여 있음을 느꼈다.

그 모든 감정이 병을 앓고서야 떠올랐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결국, 남편은 병을 겪으면서야 형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해방은 오직 병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다.

만약 경이가 먼저 등을 돌렸더라면,

그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병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관계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날 이후, 경이는 남편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가 마음을 열고 삶을 이야기할 줄은 믿기 어려울 만큼 낯설었다.

그의 말엔 오래된 침묵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경이는 묻고 싶었다.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둘은 종종 나들이를 나가고, 자주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창의력과 비례한다”는 말을 적극 지지하는 석훈이었다.

결혼생활 중 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았던 남자,

촛불이 다 타버리고 난 심지 1센티는 오직 경이를 위해 남겨두었다.

심지어 식사까지 자신이 책임지려고 했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행복을 천천히 누렸다.


가족을 뒤늦게 품은 사람.

그리고 너무 늦게 삶의 철학을 깨달은 경이.

참 공부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녀.

역사뿐 아니라, 삶에 대해 더 깊이 통찰하는 공부를 했더라면.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