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의 적

남편을 쉬게 하고 싶었다.

by 지오쌤

수술 3년 만에 결국 암은 재발했다.

하지만 남편은 암 재발 이후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퇴원한 날부터 다시 일터로 나갔고,

임종을 앞둔 두 달 전까지도 아침마다 출근복을 챙겨 입었다.

몸이 버티든 못 버티든, 그는 그저 버텼다.

‘쉬라’는 말보다 ‘일하겠다’는 결심이 먼저였다.

경이는 그를 쉬게 하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그때까지만은.


어느 날 밤, 인서가 말했다.

“엄마, 우리 200만 원만 더 벌면, 아빠가 쉬지 않을까?”


큰딸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경이의 가슴이 저릿했다.

그 말이 고마워서, 자꾸만 붙잡고 싶어졌다.

그 한마디가 모든 선택의 출발점이었다.

경이는 자기 명의로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고,

딸은 운영을 맡았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가족은 곧 한 팀이 되었다.

누구도 멈출 수 없었다.


낮에는 학생들 수업을 마치고,

밤에는 손끝 저림도 잊은 채 서서히 박스에 테이프를 붙였다.

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기도 전에 문 앞에 쌓인 택배박스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포장지 사이로 스며드는 희망은 차가운 불확실성으로 바뀌었고,

경이의 심장 한켠에는 불길한 예감이 자리 잡았다.

‘이게 정말 맞는 길일까’ 속삭이는 마음을 누르며, 그녀는 아픈 남편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불안은 말로 꺼내지 못한 채, 조용히 어둠 속에 묻혔다.

인서는 컴퓨터 앞에서 주문량을 확인하며 이마에 땀방울을 맺혔다.

재고 박스가 거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고,

쌓여가는 물건들은 무거운 짐처럼 경이의 어깨를 누르곤 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던 경이의 손이 떨렸다.

화면 속 숫자들은 번갈아 흑자와 적자를 오갔고, 지갑 속 현금은 점점 얇아졌다.

카드 명세서가 쌓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냉기가 서렸다.

석훈은 예전 같지 않았다.

힘없이 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고, 말수도 줄었다.

가족 식탁에서는 작은 목소리조차 긴장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서로의 눈길이 피하며, 미묘한 공기가 공간을 감쌌다.

말을 아끼던 경이가 문득 내뱉는 한마디가 돌처럼 가슴에 박혔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등을 돌리는 밤이 잦아졌다.

경이는 문득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화살을 돌릴 곳도, 손가락질할 대상도 없었다.

그 적은 가족 모두의 입술 사이에서,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하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 침묵 속에서 자라났다.

어쩌면 이 고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두가 힘을 잃은 그 공간 자체가 만들어낸 괴물인지도 몰랐다.

밤이 찾아오면 경이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부엌 귀퉁이에 기대어, 아무도 모르게 눈가를 적셨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끝없는 질문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무심히 지나쳤던 선택들, 외면했던 감정들, 모두가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끝없이 다그치며 또다시 어둠 속으로 묻어버렸다.

딸의 짐이 되지 않으려던 마음.

남편을 쉬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마음.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남편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는 그 시작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은 결국 누구도 쉬게 하지 못했다.

그 실패한 진심을,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마저도 경이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경이는 거울 앞에 선 채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손이 떨렸고,

무심히 내려다본 눈동자엔 피로가 가득했다.

“이게 다 내 잘못이야.”

혼잣말처럼 반복하다가, 깊은 한숨이 목구멍을 메웠다.

경이의 마음처럼 어둠이 방 안을 점점 채워갔다.


딸의 웃음소리,

남편의 무거운 숨결,

자신의 무력한 모습들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그 마음들이 갈팡질팡하며 가라앉지 못하고 그녀를 끝없이 흔들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