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주가 되기까지
타세바.
처음 그 약을 손에 쥐었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작고 하얀 약 한알. 손안에서 마치 종말을 알리는 종처럼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차마 그에게 건넬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대신 기능의학 병원을 다니면서 고용량 비타민C주사를 맞았다.
타세바는 늦게 먹일수록 시간이 조금 더 남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두 달 가까이 그 작은 알약은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표적항암제라 불리는 구강 항암제, 먹기만 하면 되는 약.
어느 날부터 기침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흉수가 찼다는 의사의 말에 경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 아직 먹이지 않았어요”
순간, 진료실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의사의 눈빛 속엔 짧고 날카로운 정적이 스쳤다.
치유가 아니라 연명을 위한 약.
매일 같은 시각, 같은 방식으로 먹어야 했다.
남편은 매일 아침,
“걸을 수 있고 숨 쉴 수 있어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손을 모은 그의 기도는 마치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질 가족을 위한 마지막 배웅처럼 느껴졌다.
경이는 그 평온함이 버겁도록 고마웠다.
동시에 그 평온 뒤엔 벗겨진 손톱, 푸석한 피부, 숨길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가끔 외식도 하고, 카페에도 들렀다.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들
그날만큼은 모든 것이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평범한 하루가, 그에겐 유언처럼 보였다.
그 기쁨을 오래 붙잡고 싶어서 경이는 무모한 사업을 벌였다,
결국 가족의 삶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 와중에, 큰딸 인서는 결혼 했다.
삶이 위태롭고, 집안은 풍비박산인데,
딸은 오직 사랑만 믿고 미래를 선택하는 듯했다.
경이는 그런 딸이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인서야, 우린 지금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알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경이의 마음을 베어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그 말 속에는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의 조용한 단념이 담겨 있었다.
결국 경이는 이불 세트와 식기 세트, 냄비 세트, 사돈댁 냉장고로 혼수를 대신했다.
10원 하나 보태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경이는 다시 카드를 긁었다.
친정 엄마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듯,
생색도, 설명도 없이.
그저 물건 하나하나에 미안함과 응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인생은 이제부터,
더 많은 슬픔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경이는 알고 있었다.
인서결혼식을 3개월 앞두고 남편은 타세바에 내성이 생겼다.
의사는 “오랫동안 복용하셨으니 당연한 일”이라며
놀란 기색없이 말했지만 경이의 손끝은 떨렸다.
처음 진단을 받았던 날보다 마음이 더 깊이 가라앉았다.
병원문을 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한 번의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앞의 세상은 순간적으로 무겁게 내려앉았고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첫 번째 DNA 검사가 진행됐다.
복용 약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적합한 항암제는 없었다.
그 사실은 경이의 가슴을 더 깊이 조였다.
손끝, 말 끝, 허리까지 몸 전체가 마음의 무게를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재검을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더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남은 건 세포독성 항암뿐이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역질이 몰려오고,
온몸이 무너지듯 앓게 되는 세포독성 항암.
그러나 그 시점, 딸의 결혼식이 석 달 남짓 남아 있었다.
“인서 결혼식 지나고… 항암 할게.”
남편은 웃지도 울지도 않고 말했다.
경이는 그 말을 받아적듯 가슴에 새겼다.
마치 유서처럼, 마음 한쪽이 차갑게 굳었다.
남편은 덧붙이지 않았다.
암은 그 사이에도 자랄 것이지만, 그의 마음은 단단했다.
걸음이 느려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경이는 느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꿈에서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는 마지막 아버지의 얼굴로 딸을 보내고 싶어 했다.
결혼식 일주일 전, 결국 그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가슴 가득 찬 흉수 때문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경이는 모든 강의를 접고 병원에 붙박였다.
그날, 경이는 오이디푸스의 독백을 떠올렸다.
자신의 마음과 몸이, 세상과 사건 사이에서 어떻게 부서지고 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느껴졌다.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흘렀다.
숨 한번, 발걸음 한 번, 모든 순간이 기억으로 박혔다.
“불행 중, 지금 여기 없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 문장이 경이의 가슴을 후벼팠다.
정말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없는 게 무엇일까.
돈, 시간, 건강, 웃음…
모두 다 빠져나간 빈 껍데기 같은 삶.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결혼식 당일 아침, 그는 외출증을 끊어 혼주 자리에 섰다.
병원복을 벗고 사위가 맞춰준 예복을 입었다.
한쪽 주머니엔 배액관이 달린 투명한 봉투가 들어갔다.
핏기 없는 얼굴, 느린 걸음 천천히 벽을 짚으며 걸었다.
경이는 옆에서 숨소리 하나까지 살피며 그를 부축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게 웃었고, 경이는 고개를 돌렸다.
양가 합의로 미니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직계가족과 절친한 친구만 초대했다.
덕분에 친구 현미의 원성과 축하를 동시에 받았다.
예식장은 작은 온실 같았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조용히 머물렀고,
하얗고 노란 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었다.
하객들은 숨을 고르듯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느리지만 단단한 몸짓으로 하객들을 맞았다.
경이는 조용히 앉아, 자리를 빛내는 사람이 아닌
사라질 듯한 그림자처럼 남편을 바라보았다.
석훈은 아버지의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예복 위로 피로가 묻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지만, 눈은 미소를 지으며 딸을 찾았다.
“아빠 여기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는 그 순간이 오늘의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을 조용히 맞잡았다.
숨 한 번, 손끝의 감각 하나도 경이 에게는 생생한 기록처럼 박혔다.
그는 그렇게 웃었다.
오늘이 아니면, 이 모습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식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작은 꽃잎들이 하객들의 눈물과 뒤섞여 피어 있었다.
남편은 새신랑 신부를 향해 짧은 편지를 읽었다,
“어리석은 아빠가 하지 못한 공부를 꼭 하길 바란다.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공부, 땅의 사람인 그들의 마음을 아는 공부,
그리고 살면서 필요한 돈 공부를 하길 바란다...”
석훈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목소리는 떨렸고, 문장 끝이 사라졌다가 겨우 이어졌다.
경이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손끝을 꽉 쥐었다.
딸은 울다가 웃었고, 하객들과 예식장 직원들도 눈물을 훔쳤다.
축의금은 카드값으로 사라졌고,
예식 비용 또한 다른 카드로 메워졌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경이는 모든 상처를 잊었다.
햇살이 머물던 그 자리,
딸의 웃음 속에서 석훈의 마지막 사랑이 빛났다.
하지만 눈을 감고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정작 울고 싶었던 사람은 경이 자신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인서가 떠난 자리, 딸의 침대와, 남겨진 책들 사이에서
경이는 여전히 체온과 체취를 느꼈다.
컵을 씻던 손끝에 문득 인서의 말이 떠올랐다.
“장남이나 외동아들.”
무시당하는 엄마와 아빠의 삶을, 딸이 얼마나 경멸했는지
경이는 알고 있었다.
인서는 늘 그런 가족을 꿈꿨다.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는 관계를 원했다.
그런데도 경이는 묻지 못했다.
인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같은 진실을 알고도 서로를 모른 척해주었다.
어쩌면, 그게 경이와 인서의 화해였는지도 모른다.
한때 인서는 경이 인생의 가장 솔직한 대화 상대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코앞에 두고도
식탁 앞에 앉아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
지금은, 마주 앉아도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녀들은 말을 잃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말,
서로를 안심시키는 말,
서로를 다시 이어주는 말. 모두 잃어버렸다.
누구의 잘못인지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때 그 말 한마디가
되돌릴 수 없는 벽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서로 모른 척, 아픈 척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등을 돌렸다.
마치 숨을 고르듯, 시간은 아무 말 없이 흘렀다.
경이는 인서 결혼식 날 친구 현미가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의지했다.
“ 삶은 바느질 같아. 구멍 난 곳이 있어도, 한 땀씩 이어가면 돼.”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