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마음
이사로 유치원을 그만둔 인서가 마음에 걸렸다.
마당이 있고 한 귀퉁이에 토끼가 있는 유치원을 유독 좋아했던 인서였다.
경이는 인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인서야, 어떡하지. 유치원은 내년에나 다시 가야 할 것 같아.”
잠시 멈칫하던 인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난 좋은데! 엄마랑 인후랑 같이 있으니까 너~~ 무 좋아!”
그 말 한마디에, 경이는 인서에 대한 부채감마저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성당을 찾았다.
결혼식 전 남편과 함께 신부님을 찾아뵙고 관면혼배를 했으며 아이들도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했지만 그동안 소홀히 믿음생활을 했었다.
그렇게 삶은 조금씩, 다시 빛을 품기 시작했다.
송파구에 마련한 28평 아파트는 네 식구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어릴 때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아랫목 처럼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경이는 아이들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도록 베란다전체에 마루를 깔았다.
무엇보다, 이제는 ‘내 집’이니까.
아이들은 마루를 깐 베란다를 무척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곳에 나가
큰 창 너머 놀이터를 바라보고 먼산의 변화를 나날이 알아갔다.
멀리 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아담한 어린이 놀이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 경이가 가꾸었던 화단을 떠올리게 했다.
인서는 인후를 데리고 매일 놀이터에 나갔다.
작은 꽃삽과 양동이를 들고, 마치 출근하듯이.
흙을 파고, 물을 뿌리며, 스스로 만든 작은 세계를 지켜내듯
마치 어린 경이가 자신의 꽃밭에 나가던 것처럼
두 아이는 매일은 그녀의 유년시절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뛰놀던 그 시절처럼,
자신의 아이도 영혼 깊숙이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나둘 늘어난 인형들이
베란다 마루 위에서 작은 가정을 꾸리고 인서와 인후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아담한 집에 어울리는 카우치 소파와 쿠션, 방석도 새로 들였다.
아이보리색 방석과 귀퉁이에 핑크색 자수가 놓인 흰색 쿠션 네 개를 나란히 배치했다.
집 안은 조금씩, 안온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어갔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내 집을 마련한 석훈에게 회사 동료들은 집들이를 재촉했다.
샵을 그만둔 경이는 일할 때보다 더 낯설고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저녁, 퇴근한 석훈이 물었다.
“회사 동기들이 집들이하자는데, 어떻게 할까?”
경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면 되지, 걱정 마.”
브러시와 화장품을 들었던 손으로 무슨 배짱이었는지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집들이 날, 그들은 두 그루의 동양란을 들고 왔다.
아마 석훈이 화초 좋아하는 경이를 의식해 슬쩍 귀띔한 모양이었다.
회사 동기들은 부부 동반은 물론 아이들까지 데리고 왔다.
인서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온 연구실 직원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보다 두 살 연상이라고 했다.
친절한 그녀의 말씨와 성숙한 몸짓에서 경이는 언니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인서네는 꼭 필요한 것만 정갈하게 있네, 아기자기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돼서 보기 좋다.”
경이는 가만히 웃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어린 손님들의 발걸음,
부부들이 잔잔히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작은 집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두 그루 동양란은 거실 한쪽에 놓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경이는 꽃이 자라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꽃을 가꾸던 소녀처럼,
이제 아이들이 자신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놀기를 바랐다.
그 순간, 경이는 새 집과 새로운 삶을, 그리고 평화로운 하루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하루는 정신없이 서툴게 지나갔지만 행복했다.
단아한 동양란의 향을 아는 경이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맞아들였다.
아직 어린 두 아이의 동선을 살피며, 그녀는 동양란을 애지중지 보살폈다.
그러나 삶에도 복선이 깔리는 것일까?
어느 날 낮잠에서 깬 인후의 울음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경이는 급히 뛰쳐나갔다.
“ 엄마 - 흐 흑 내가 발로 찼나 봐”
동양란 하나가 거꾸로 넘어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경이는 인서를 안아 다독이며 아이의 몸부림을 진정시켰다.
화분은 깨졌고, 난석은 사방에 흩어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깨진 잎을 조심스레 걷어내며, 그 뿌리를 들여다보았다.
길게 뻗은 뿌리는 마치 발가락이 길어진 듯했다.
“괜찮아, 괜찮아”
입으로는 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런 생각은 스치지 않았다.
다만, 창밖으로 들어오던 볕이 그날따라 조금, 차갑게 느껴졌을 뿐이다.
경이는 다음 날, 동양란을 새 화분에 옮겨 심었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그녀는 조심스레 잎을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이 작은 생명처럼, 우리 아이들도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경이는 다시 한번 자기 손으로 세계를 지킬 수 있다는 안도와 평화를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점은 더 멀리 뛰기 위해 속도를 높여야 할 때였는지도 모른다.
능력도 있었고, 젊었으며 무엇보다 집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들도 제법 자라, 일을 다시 시작하기엔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그런 그녀가 일을 내려놓고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기로 했을 때,
누군가는 ‘후퇴’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결정은 어쩌면 자의보단 타의에 가까웠고,
평화란 결국 누군가가 물러서야 만들어지는 것임을.
그러나 이미 손을 놓은 일이라면, 남은 시간을 아이에게 쓰고 싶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텅 빈 집에 홀로 들어가 공허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유년 기억은 풍족했고 웃음이 많았으며 사랑이 가득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따뜻하고 풍요로운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서성이고 숨죽이며 살던 경이가 한 번씩 웃을 수 있었던 그 시절처럼
그 기억을 아이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좋은 엄마’라는 이름을 쓴 그저 생활의 균형을 잡기 위한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땐 그게 당연했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고 그마저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다시 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나면, 내 시간이 다시 올 거라 믿었다.
물론 때때로 시댁에서의 날들은 여전히 경이 마음을 갉아먹었다.
남편은 여전히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했고,
동서와 시누들의 시선은 시기인지 원망인지 모르지만 차가웠다.
그런 그녀에게 신앙은 잠시 숨 쉴 수 있는 조용하고 안온한 공간처럼 다가왔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