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기억.
젊은 부부만의 힘으로 마련한 집은 비교적 안온했지만, 국가는 위기였고, 남편은 싱가포르에서 달러를 불규칙하게 벌어들였다.
바른생활맨의 석훈과 융통성 없는 경이는 달러며 금붙이를 탈탈 털어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
경이는 종종 생각했다.
기회란 누구에게 오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것을 평생 배우며 따라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경이는 언제나 후자였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14년 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였다.
마치 어느 순간부터 멈춘 영상처럼, 장면이 정지한 채 이어지는 느낌이다.
석철의 아들 주호가 상주들만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작은엄마, 제가 유학 가서 첫 시험에 몇 등 했는지 아세요? 꼴찌였어요.
그 후 엔요, 그냥 다 놓고 저 막살았어요.”
일리노이주립대로 유학을 간 주호는 집안의 기대를 받았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툭툭 흘러나오는 말.
그 말에는 부서진 아이의 기운이 묻어 있었다.
경이는 숨을 고르며 그 고백을 온몸으로 받아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주희는 목소리는 낮았지만 눈과 목소리에 기압을 넣어 주호에게 욕설을 뱉었다.
아들을 향한 분노와 실망이 섞인 소리였지만, 경이는 그 장면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주호와 주희, 그리고 장례식장의 공기가 한 덩어리처럼 서로를 압박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주호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 나이에 자신을 부수며 꺼내놓은 고백을, 경이는 받아주지 못했다.
그날의 침묵은 그대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경이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다.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경이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지 않지만, 남은 것은 오롯이 상처뿐임을 느낀다.
경이가족이 싱가포르에서 궁핍과 무력함을 견디며 귀국을 결심하던 그 마지막 밤,
경이도 모든 걸 놓고 막살고 싶었었다.
주호도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늦게서야 경이는 그때 주호가 남긴 눈빛을 다시금 되새겼다.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된 어른이 어른답지 못했던 시간, 누군가의 침묵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절규가 되었고, 그 연쇄 속에서 경이는 자신조차 누군가의 상처였는지 깨닫지 못했다.
주재원으로 나간 홍콩에서 5년 만에 돌아온 주희 가족은 28평 경이 집에서 2주를 머물렀다.
경이가 마트에 다녀오던 어느 날, 어린 인후와 인서는 방바닥에 엎드려 큰엄마 주희가 틀어준 캠코더 영상을 보고 있었다.
국제학교 다닌 주희 딸의 노래, 춤, 바이올린연주 등 사촌 언니 재롱잔치를 보기 위해 경이 딸들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 표정을 훔쳐보았다.
이때 아이들 표정은 정지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처음 보는 감정이 얼어붙은 듯 박혀 있었다.
말없이 무너지는 자존감,
그 조용한 고통.
그리고 숨죽인 채 견디는 불안.
누구든 누리는 것을 보여줄 자유는 있다.
문제는 그 자리를 그냥 두었다는 점이다.
말없이 어른인 척, 그저 참고만 있었다.
그 침묵이 아이들에게 번졌다.
아무 말도 못 했지만, 그들 마음엔 어떤 그림자가 자라났을지 궁금하다.
더 무서운 건, 그 그림자가 무엇인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2주를 머무는 동안 식사를 차리고
빨래를 돌리는 일은 모두 경이 몫이었다.
진심으로 불편하지 않았다.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직업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스스로 대견해했다.
그때는 어떤 빛깔의 감정도 들이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그저 ‘좋은 사람’이 되려 애썼다.
속마음은 늘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단했고, 말에는 늘 궤도가 있었다.
그 궤도에서 벗어난 삶은 늘 ‘부정형’이었다.
경이와 석훈의 삶도 그 부정형 안에 놓여 있었다. 경이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야 몸으로 느꼈다. 하지만, 원망은 없다.
어리석었다는 것도 알고, 그 어리석음이 자신을 여기까지 살게 했다는 것도 안다.
가끔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살아가는 편이, 자신을 돌보는 방법임을 배운다.
지금도 그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캠코더 앞에 엎드린 아이들의 등을 경이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아이들에게 묻지를 못한다. 혼자서 미친년처럼 가만히 물었다.
“그때, 너희는 어떤 마음이었니?”
인서가 어린 시절 화장실에 갇혔던 기억.
울음 대신 쏟아낸 분노와 절규는 오래도록 경이 가슴속에 박혔다.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따라다녔다.
사춘기 시절, 인서와 거센 충돌 역시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었다.
엄마로서 미처 닿지 못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늘처럼 경이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경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상처 돌보기도 벅찼던 내가, 어떻게 딸의 상처까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인서가 들려준 기억 속 엄마는 늘 무심하고, 때로는 벽처럼 보였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던 순간들이 사실 자신 안의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주희는 종종 경이 에게 말했다.
“특이하다.”
그 말속에는 칭찬도, 의아함도, 그리고 어쩌면 거리 두기도 섞여 있었다.
그것은 이질감이었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부 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