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꺼내는 일
주희는 자주 서슴없이 경이에게 특이하다고 했다.
무엇이,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그때의 경이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 말의 결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을 향해 무심히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가까웠다.
‘특이하다’는 말은, 타인을 규정하려는 말보다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어 놓은 표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돌아온 그들이 경이집에서 더운 여름을 함께 보낼 때, 주희는 아이들 책장을 흘긋 보며 말했다.
“책이 꼭 이렇게 많아야 돼?”
그 말에 경이도 아이들도 시선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경이는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했다. 책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현실질서를 잠시 잊은 사람처럼 보였을까.
집안에 책방 하나를 들여놓은 사람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18세기 조선에서 소설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사람처럼 보였을까.
아이들 책장 주변을 오가며 엄지 손가락으로 책등을 밀어 흐트러뜨리던 그녀의 행동은 집에다 조선판 세책점을 차렸다는 비판같기도 했다.
혹은 네 주제에 맞게 전기수의 낭독이나 들어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서와 인후는 현대판 전기수의 낭독을 듣고 보기 위해 경이와 함께 도서관을 자주 다녔다.
주희 눈에 경이가 몰입하는 모습이 낯설고,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그 말이 무엇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내뱉고 무엇을 겨눈 말이었는지 그때의 경이는 전혀 몰랐다.
어리숙한 경이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종이를 소비한 대가로 닥나무라도 심으란 말인가 하고...
아마 주희도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방법이 경이와 달랐을 뿐, 결국은 같은 무게를 견뎌낸 삶이지 않은가.
경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어른 됨’의 자리를 제대로 지킨 적이 있었던가.
조용히 묻힌 이름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
그리고 끝내 불리지 못한 진실들.
이제는 자신이 스스로를 불러내야 할 시간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불러야 했던 이름은 ‘미친년’이었다.
조선에는 직업적으로 매를 대신 맞는 매품팔이가 있었다 한다.곤장 백대를 맞고 일곱 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경이는 수업을 이어가다 문득 생각했다.
남의 욕을 대신 듣는 직업도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미친년’이라는 말보다 더한 욕을 아무 대가 없이 기꺼이 받아야 했을 것이다.
남의 욕까지 감당해야 했을 만큼, 그 시절의 자신은 어리석음의 총체였으니까.
이제는 누가 더 아팠는지를 묻기보다,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조용히 꺼내는 일.
그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도리라고 경이는 믿는다.
-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일 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