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끝

단호함의 시작

by 지오쌤

가을 무렵, 시댁 가족 모임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경이가 내야 할 회비는 석철이 내주겠다고 했다 한다.

무엇이 두려워 석훈이 살아 있을 땐 단 한 번도 오지 않던 그가

과부가 된 경이를 위해 “회비 대신 내줄 테니 오라”고 말했다.

동생몫의 유산을 챙긴 부채감 때문일까.


경이는 가지 않았다.

얼마 후 막내 시누를 통해 두 번째 연락이 왔다.

목구멍아래 숨겨놓았던 원색적인 발언을 했다.

“고모 같으면 가고 싶으세요?

죽은 사람이 이 집에서 막내아들 아닌가요? 형님도 누나들도 모두 배우자가 있는데,

가장 어린 제가 과부로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다들 편하시겠어요?”


처음 거절할 때 점잖은 척 삼켰던 말이 경이의 목구멍을 거칠게 찢고 나왔다.


침묵 중이던 경이가 이제는 지껄일 수 있었다.

“회비 대납”

그 말이 누군가에겐 ‘편함’ 일 수 있겠지만, 경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얼마 뒤, 또 다른 제안이 들려왔다.

“언니! 올해부터는 언니 생일을 챙겨주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막내시누의 말을 듣는 그 순간, 경이는 말문이 막혔다.


서른 해가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의 달력에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그동안 단 한 통의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심지어 친정부모님과 시어머니 생신이 겹쳐 결혼생활 내내 친정아버지 생신엔 딱 한번 참석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떠나자, 마치 어딘가에서 의무라도 생긴 듯 이제 그녀의 생일을 챙겨주겠다고 한다.

그 말에는 정이 아닌, 이상한 동정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아가씨 저는 형님들과 생일 선물 주고받을 여유가 없어요.

오빠가 남긴 빚 갚기도 빠듯한 상황이라, 그런 건 사양할게요.”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을 깨고, 자신만의 경계를 그었다.


'결혼'이라는 인연으로 가족이 되었고 친숙해졌다.

고마움은 색이 바래 당연함이되었고

미안함은 사소함이 되어버렸다.

세상 모든 관계가 그렇게 변하겠지만 경이는 그동안 시댁에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다.

경이에게 때늦은 관심과 동정은 소용없었다.

그리고 다시,

석훈의 장례식이 여섯 달쯤 지난 어느 날, 동서 주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 걸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결혼 후 첫 명절에, 경이를 친정에 가지 못하도록 몰아치는

공포스러운 바로 그날의 그 목소리 톤이었다.

앙칼지고 또렷한 음성, 상대를 몰아치는 뉘앙스, 한숨 섞인 저음과 비명처럼 치솟는 고음,

가해자 의식을 지운 단호함. 그날도 그녀는 똑같았다.


지금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렇지만

아니~~ 애들 아빠가 뭘 어쨌다는 거야아?”

아빠의 장례식 후 큰아빠에게 보낸 인서의 문자가

아직도 이들을 뒤흔드는 모양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경이는 그 안에서 자신의 어두운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모두 타인의 예민함이거나, 오해일 뿐이었다.


“나는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그쪽 일은 그쪽에서 해결하세요. 전화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경이는 깨달았다.

그들의 말은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설득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경이가 다시 그 자리에 나와 앉는 일이었다.

경이가 그것을 거절한 순간,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이유조차 사라졌다.

경이는 단지 거절했을 뿐이다.


그 자리에, 자신을 두지 않겠다고.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경이를 향한 공격의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평생을 호구로 살던 경이가 이제야 목소리를 냈다.

남편을 땅에 묻고서야 호구 경이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한 창작물입니다. 일부사건과 인물은 픽션이 가미되었으며 실존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_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