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안전망'이 촘촘해야
이념은 '성장 대 분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처럼 층위가 높고 개념이 크다. 그래서 잘 와 닿지 않는다. 1천 원은 300원이나 450원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단박에 알아챌 만하나 1천억 원, 1조 원의 용처는 쉽사리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이렇게 커다란 개념인 이념은 난치병 선고처럼 다가온다. 평소에는 별 감흥 없지만 막상 이념 갈등으로 초래된 결과가 나와 가족에게 영향 줄 때 그 존재감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경제 문제가 우리 삶 속에서 직면하는 이념 갈등의 전형이다. 넓게는 '신자유주의', 한 층위 내리면 '고용유연화'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한 층위를 더 내려 보면 몇 달 뒤 정규직 전환 안 되고 계약 만료로 퇴사해야 하는 '쪼개기 계약' 비정규직 직원 등이 나타난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희망고문은 사업장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자행된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2012년 27.9%였던 정규직 전환율은 2014년 20.6%로 매년 하락했다. 반면 계약 종료율은 2012년 51.7%에서 2014년 58.6%로 증가했다. 일자리 난민이 되어 또 다른 입사준비를 해야 하는 일자리 난민이 해마다 늘어나는 형국이다.
문제는 개인이 이런 파고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는 점이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가고 서울 시내 한 복판 전광판에 올라 '부당해고 철회하라' 외치는 노동자는 진보 이념으로 비춰보면 '용자(용감한 자)', 보수 이념 관점에선 '반골 강성 분자' 정도 되겠다. 이념과 이념의 간극은 서슬 퍼렇다. 나 같은 보통사람은 이 간극 사이로 난 외줄타기를 과감하게 단행할 재간이 없다. 사회적 낙인찍히는 게 무섭다. 가정을 건사하지 못하거나 재기하지 못할까봐 무섭다. 차라리 현실에 순응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게 필부필부의 대안이다.
적어도 재기의 발판만큼은 강고했으면 좋겠다. 40대 이상, 50대를 넘어선 중장년에게 실업은 암 선고와 다름없다. 전경련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중장년 구직자 43%가 재취업 준비기간 없이 퇴직했다. 37.1%는 퇴직 후 1년 이상 장기 실업 상태였다. 실업의 충격은 암담하다. 고용지원센터가 각 지자체마다 설치돼 있다. 하지만 재취업 교육은 엉망이다. 실업급여는 구직활동을 허위 작성하더라도 받을 수 있다. 진짜 재기를 위해 칼을 가는 사람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세금도 그만큼 샌다.
재취업 교육의 질을 높이거나 민간 고용사이트와 더욱 긴밀히 공조할 필요가 있다. 허위 구직활동과 부당 실업급여 수령을 막기 위해 개별 면담을 농밀하게 하거나 집단 상담 프로그램 등을 강화해 이 과정에서 허위 구직활동자를 걸러내는 작업도 검토해야 할 대목이다. 이렇게 아낀 돈은 진짜 재기할 자세를 갖추고 성실히 준비하는 구직자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실패는 우리를 곤고하게 하지만 공고하게도 만든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제도적 '사회안전망'이 촘촘하게 짜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의 이념을 결코 허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실패자가 실패에 머물지 않고 재기해 경제에는 노동력을 통한 활력을 제공하고 다른 노동자에겐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역경을 이겨낼 힘은 재도약 기회에서 나온다. 세금 꼬박꼬박 내는 국민을 위해 그 정도는 정부가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인지상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