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11

매화, 매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작은 기록

by JipDolE

얼어붙어 있던 땅이 서서히 녹고,

손끝을 시리게 하던 바람이 어느새 부드러운 봄바람으로 바뀔 때쯤,

매화는 가장 먼저 봄의 시작을 알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고향이 광양이라고 말하면 반응은 대개 둘 중 하나다.

절반은 “광양이 어디예요?” 하고 묻고,

나머지 절반은 반가운 표정으로 “불고기?” 하고 되묻는다.


물론 광양불고기가 유명한 건 맞지만, 정작 광양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자주 먹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건 마치 전주가 비빔밥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전주 사람에게 “비빔밥!”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참고로 전주에서는 순댓국이 더 맛있고, 더 자주 생각난다.


어쨌든 광양 사람들에게 광양의 특산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게는 가장 먼저 ‘매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종종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매실?” 하고 한 번 더 되묻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매화라는 꽃은 잘 알아도,

그 매화나무에서 열리는 열매가 매실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는 듯하다.


왜 그럴까.


그저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만 오래 바라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연분홍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은 기억하면서도,

그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동그랗고 푸른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내게 매실은 단순한 특산물이 아니다.

매실을 생각하면 늘 함께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소화기가 약했다.

매운 음식은 잘 먹지 못했고, 찬 음식도 부담스러웠다.

조금만 잘못 먹어도 금세 체하곤 했는데, 그러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결국 토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과한 음식을 먹으면 어김없이 두통이 오고, 가끔은 구토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늘 집에 매실 엑기스를 준비해 두었다.

생각해 보면 광양에서는 많은 집들이 그렇다.

매실은 소화가 안 될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익숙한 음식이니까.


화장실에서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축 늘어진 채 나오면,

엄마는 말없이 매실 엑기스를 한 컵 따라 내게 건네주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당연하게 받아 마셨다.

엄마가 늘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돌봄을 받으며 살 것처럼 여겼다.


지금 와서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약한 속 때문에 괴로워하는 어린 딸을 보며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아픈 것보다, 아픈 나를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쩌면 더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른을 넘기고 혼자 살게 된 지금,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구토를 하고,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보면

문득 스스로가 너무 가엾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상하리만치 자꾸만 엄마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엄마가 건네주던 매실 엑기스 한 컵이 떠오른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리운 것은 매실 엑기스 그 자체가 아니다.

아플 때마다 내 등을 쓸어주던 손,

괜찮다고 말해주던 목소리,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주던 엄마의 마음이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엄마는 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내가 힘들 때면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사람,

세상이 달라져도 변함없이 나를 보살펴줄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런 엄마가 벌써 올해 환갑이 되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백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엄마는 이제 시작점보다는 끝에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이다.

시간은 늘 똑같이 흐르는데,

왜 부모의 나이는 유독 어느 날 갑자기 실감 나는 걸까.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젊고 단단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진 속 엄마의 얼굴에서는 세월이 보이고,

손등에는 잔주름이 보이고,

예전보다 조금 느려진 걸음걸이마저 눈에 들어온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찡해진다.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 있나 싶고,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을 당연하게 흘려보냈나 싶어진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중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매일이 쌓여 삶이 되는 동시에,

매일이 지나가며 이별에 가까워지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정작 가장 소중한 것들은 늘 너무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쳐 버리곤 한다.

언젠가는 정말 내 곁을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오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꾸 미루고 만다.


그래서 요즘은 자주 다짐한다.

한 번이라도 더 엄마를 보러 가야지.

전화 한 통이라도 더 해야지.

사소한 안부라도 더 묻고,

같이 밥 한 끼라도 더 먹어야지.


봄이 오고 있다.


머지않아 매화나무에는 다시 꽃이 필 것이다.

환하게 피어난 꽃들은 올봄도 어김없이 계절의 시작을 알려줄 테고,

꽃이 진 자리에는 또 동그랗고 푸른 매실이 맺힐 것이다.


나는 아마 그 풍경을 볼 때마다

고향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고,

무엇보다도 엄마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고운 매화가 피고,

더 싱그러운 매실이 맺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계절을 맞이하는 동안만큼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더 늦기 전에, 더 깊이 아껴야겠다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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