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4

잠깐 내렸다 사라진 소나기였던 G에게

by JipDolE

G는 이뻤다.

비록 무대에서 빌려온 빛으로 희미하게 보았을 뿐이었지만 분명 이뻤다.


한참 인디밴드에 빠져있었을 때가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들의 연속인 때 베이스 소리에 이끌려 밴드들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직접 밴드를 보고 싶어 처음으로 홍대로 공연을 보러 갔었다.


신기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왔었고,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일렁이며 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괜스레 비교가 되었고 무리에 속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갈 때쯤 슬며시 뒤로 빠져나왔고 집에 가기 직전 팔짱을 낀 채 잠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려던 찰나 누군가 툭툭 치면서 핸드폰 메모장을 들이밀었다.


'죄송한데,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니요...'


건네받은 핸드폰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천지인 자판기를 하나씩 눌러 입력했다.

그 뒤로 조심스럽게 연락처를 여쭤보셨고 알려주자 G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이비종교인가...?'

누군가 내게 연락처를 물어볼 만큼 난 매력 있지 않은데,,,

의심 서린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향했고, 씻고 나오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아까 번호 물어봤던 사람인데.... 잘 들어가셨을까요?'


이상한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포근한 샴푸향이 같이 밀려왔다.

G와 몇 번의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잡은 뒤 미소를 띤 채 잠에 들었다.


약속날, 상수역을 나와 걷다 무성한 나무들이 만든 회랑 사이로 붉게 물든 도로가 눈에 밟혔다. 문득 걸음을 멈칫했다. 잔잔한 바람에 초록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 그리고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다시 가려고 한 순간, G가 서 있었다.


하얀 크롭티,

긴 생머리,

차콜색 백팩을 멘 그녀가 나를 보며 환한 미소 짓고 있었다.


설렜다

잠시 말을 잊고 서로 마주 보며 웃기만 했었다.

6월 어쩌면 설렘의 계절이기도 한 여름의 시작은 그렇게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 이후 카페에 들어가 통성명을 나누고 조심스러운 인사말이 오고 갔다. 별것 아닌 대화를 시시콜콜 나누고, 산책을 좋아해 같이 걸었고,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를 들고 G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두 번 더 만나며 시간을 공유했지만, 감정이 앞섰던 탓일까,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탓일까. 우리는 좋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잠깐 내리다 언제 그랬냐듯이 사라지는 소나기처럼 G는 그렇게 흔들어놓고 사라졌다.

G와 나는 인연이었을까.

우연히 만났지만 필연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들. 하지만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안주하는 순간, 나는 관계를 지키는 일을 운명에게 떠넘긴 건 아니었을까


후회와 아쉬움의 감정들로 인한 생각들이 많아졌고 내 상황이 그리고 G의 상황이 그랬기에 어쩔 수 없었어라고 생각하면서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고 돌아보고 있는 지금은 그냥 용기가 부족했기에, 자신이 없었기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을 망설였기에 딱 거기까지밖에 다가가지 못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항상 수동적인 것 같았다.

이 정도 했으면 알아챘겠지, 이렇게 말했으면 알아주겠지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다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상처받고, 정리했다.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별거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까운 감정이 들었던 탓일까?

어느 정도 성숙한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직 '어른아이' 였던 것이었다.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언제라도 떠날까 봐 전전긍긍 해댔었던 그런 아이


미련이 남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에도 아른거려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지금껏 받는 사랑만 해왔기에 선뜻 다시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대로 끝내면 후회가 남을 것 같아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받지 못했다.


그렇게 털어버렸다.


여름이 좋다.

정확히는 초여름이 너무 좋다.


이런 추억들이 묻어나 있어서 그런 걸까? 5월이 끝나가고 6월이 다가오는 시간이 되면 마음속에 무엇인가 포근해지는 듯한 기분이 스며든다.

햇살과도 같았던 미소를 가지고 있었던 G와의 이야기는 짧았지만 여운이 짙었고 깊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때는 솔직할 수 있을까?


'색이 선명하고, 차지 않은 밤공기가 좋아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당신 덕분에 그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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