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밤

by 지라르

왜... 그러신 거죠?

벤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와 마주칠 때마다 괜히 주눅이 들었고,
나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의 말 앞에서는 내가 애써 둘러싼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효율’이라고 포장한 요령,
내가 나를 합리화하는 변명,
남의 탓으로 돌려놓고 잊어버리려는 습관


벤노는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스스로를 속이며
진짜 마음을 직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건드렸다.


몇 해 전, 싱클레어를 향해 분노를 쏟아낼 때
데미안이 내 안의 어두운 욕망을 찔러낸 적이 있었다.


데미안.


모든 것을 아는 듯 오만한 눈빛으로
내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 신비로운 소년.


그 경험은 두려우면서도
이상하게 매혹적이었다.


벤노 또한 같았다.
그러나 같으면서도 달랐다.


신비로운 소년이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관망했다면,


산전수전을 겪은 남자는
자신을 비추는 눈으로 나를 꼬집었다.
마치 내 어리석은 모습에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까닭은,

아픈 부분을 꼬집을 때의 벤노의 눈이

왠지 모르게 서글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더 궁금했다.
그 슬픔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견뎌내
지금과 같은 눈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나 또한 내가 외면했던 것을
직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종일 마음이 들썩였다.

함께 일하는 순간마다
내 눈은 그를 좇고 있었다.


단둘이 있을 틈만 기다렸다.
그의 손이 잠시 멈추는 순간,

그가 혼자 남는 시간을 노렸다.
가슴이 조여 오면서도
그 순간이 오기만을 바랐다.


일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벤노는 구석진 그늘 아래에서
공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손짓 하나, 숨결 하나까지도 조용하고 단단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다가갔다.


별생각 없는 척, 흙 묻은 장갑을 벗으며 옆에 섰다.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벤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뭔데"

"아저씨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왜?"

"알고 싶어요. 아저씨가 했던 말이

자꾸 떠나지 않아요.

아저씨는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는지.

다른 어른들처럼 과시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할 수 있는지."


내 마음을 직면하고자 결심했기에

내 말 또한 거침없었다.


그런 나의 태도에 낯간지러워할 법하지만

벤노는 진지한 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너, 사람을 좀 미화하는 재주가 있구나."

"재주는 많을수록 좋겠죠"


벤노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 여기 앉아봐라.”


그는 옆자리를 털어내듯 손으로 툭툭 쳤다.

그 옆에 앉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그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멀리 있는 기억을 더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자 나를 키우기엔,
어머니에겐 많이 버거웠던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멀리 있는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머리 위로 선선한 바람이 한 번 더 스쳐 지났다.

그가 이어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음... 10살도 되지 않았을 거야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집에서 아주 먼 곳으로 갔지.

가는 길에도 정확히는 몰랐지만,

느꼈어.

이제 어머니랑은 떨어져 살아야겠구나 하는 걸."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싫었겠네요."


“붙잡고 싶었지.
그때는 아주 어렸으니까.


내가 의지할 사람은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계속 걸었던 어머니의 손뿐이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붙잡고 있는 손과 그녀의 어깨와 등을 보았지


짧은 다리로 그녀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들었지.


그럼에도 힘들다는 불평 한 마디가 더 빨리

멀어질 것 같았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


어머니의 저 움츠려 있는 어깨가

거의 뛰는 듯 따라가는 나의 다리보다 무거웠을까


끌려가듯 따라가는 나의 어깨가

손에서 느껴지는 굳을 살보다 아팠을까


내가 훔친 나의 눈물이

그녀가 훔친 그녀의 눈물보다 매울까.


그러니 곁에 있으면 안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어느 교회에 도착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입을 열었어.


'여기 잠시 있어'라고"


"..."


"나는 알겠다고 말했지.

그리고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등을 가만히 바라봤어. 끝까지.

그래도 작은 위안은 있었지.

아침이면 교회사람이 나와서

나를 모른 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따라가고 싶지 않았어요?"


“난 언제라도 갈 수 있었어”


“어떻게요?”


“ 그 교회는 내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도

좋은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곳이었어

거기가 어디쯤인지는 알아.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한 놈이었어

오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거든.

도중에 간판이 큰 가게가 몇 개 있었어.

그러니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어."


"돌아가셨나요?"


벤노는 침묵했다.

나는 궁금했지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벤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거기서 어머니가 가고 나서 벽에 기대앉아 생각했어

왜 하필 여기로 나를 데리고 왔을까.

이미 소문이 난 곳이라서 돌아갈 길을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왜 어머니는 여기로 오는 길에 중간중간 멈췄다가 걸었을까

큰 간판이 보일 때마다 멈춰 선 것을 보면

그 이유가 아픈 나의 다리를 신경 쓴 것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리고 나는 깨달았지.


그 어두운 밤에,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나를 두고 간 것은

자신을 찾을 수 없게 한 거야


하지만 중간중간 그녀가 멈춰 선 것은

혹시라도... 혹시라도 돌아오게 된다면

내가 잘 찾아올 수 있게 한 거야. “


"왜... 그러신 거죠?"


"어떤 순간이라도 마음은 하나의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슬픈 와중에도 기쁠 수 있고,

기쁜 와중에도 슬플 수 있어.

매 순간순간 다양한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야."


벤노의 눈은 나를 향했다.


"그렇다면 왜 돌아가지 않았어요?"


"어머니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간다면 어머니가 힘들었을 거야

돌아갈 수 없었어."


그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녀는 내가 잘 돌아왔으면 했잖아

난 그걸로 충분해

내 안에는 억울함도 있어.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없는 건 아니었거든”


벤노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 뻔했다.


저 사람의 깊은 내면이

저 웃음을 통해 보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나 같은 놈이 봐도 되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원망했을 것 같아요."


벤노는 담담하게 말했다.


"원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에는요?"


"어머니가 사라지고 나서야 울음이 터졌어.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지.

너무 슬프다, 너무 힘들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
이제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그 손,
멀어져 가는 등을 끝까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


이렇게 슬픈 거라면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이렇게 아픈 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겪지 않으면 좋겠다고.”

keyword
이전 10화옳은 일만 할 수 있는 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