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갔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는 교사였고,
제자 중 한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다행히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큰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벤노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 일에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아마 그 일은 벤노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유는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따뜻한 사람이라서다.
이러니 나는 그를 동경할 수밖에 없다.
따뜻한 마음을 품은 그가
좌절한 곳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일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모자라고 부족한 나였지만,
그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그가 없는 일상도
별다를 게 없었다.
문득문득 그가 떠오르지만,
여전히 바빴다.
하루 종일 먼지를 들이마시고,
해가 지면 땀 냄새를 벗 삼아
술 한잔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힘든 일을 마치고도 지친 기색을 숨기며
언제나 먼저 웃어주었고,
세상이 덜 고단하게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잘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배운 것이 크다.
그는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인정했고,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때로는 그 욕망이 어리석더라도,
그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자기감정을 똑바로 들여다보려 했다.
욕망을 예쁜 끈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그는 유니크했고, 아름답다.
종교는 내게 언제나 혐오스러운 대상이었지만,
그의 삶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가 믿는 종교를 존중하고 싶다
그와 함께 있으면 즐겁기도 했지만
배울 것이 많았다.
그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이유는
아는 것도 없고, 정직하지 않은 나지만
말재주가 좋았다.
어린 나이이지만
어른들 앞에서 기죽지 않았다.
상쾌하지 않은 말투지만,
유쾌하고 통쾌한 말을 잘했다.
그런 모습이 아마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 테다.
그래서 우리 둘은 잘 맞았다.
서로 다른 점이 있었지만,
그 다름이 재밌었다.
나는 그의 솔직함을 동경했고,
그는 내 거칠지만 솔직한 입담을 즐겼다.
우리는 자주 들렀던 작은 술집에 갔다.
좁은 가게 안은 웃음소리와 술 냄새로 가득했다.
요한과 나는 습관처럼 자리에 앉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맥주를 시켰다.
“요한, 오늘은 술값 네가 낼 거지?”
“내가 술값도 안 내고
매일 얻어마시는 거지 같은 놈인 줄 아나?”
“저번에는 어머니 아프다고 해서
돈이 많이 나갔다고 했잖아.
그 뒤로는 한 푼도 안 냈어.
알고 보니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팔아먹었더라?
그러고도 천국 가길 바라냐?”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내가 술값 아끼는 걸 보시면
그걸로 행복해하실 거야.”
“네가 모시는 신이 사탄이냐?
십자가 거꾸로 들고 다니지?”
“어허, 무엄하다.”
“뭐야, 그 말투는 ㅋㅋ”
“동방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밥을 산다고 하지 않나?”
“그러면 요한, 네가 사야지.”
“앞으로는 네가 형 해라.
술 사는 걸로 동생 생기면 이득이지 않아?”
“그래, 동생아.
근데 동생이 왜 이렇게 늙었니?”
우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때 누군가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손은 희고 작았다.
그 작은 손에 굳은살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개를 들자,
머리를 높게 묶은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내 또래쯤 돼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흰 블라우스에 검은 앞치마,
일을 위해 몸을 단정히 가다듬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가게 안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결을 띠고 있었다.
맑으면서도 깊고,
단단함이 서려있다.
그녀는 말린 안주거리를 마저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돌아섰다.
요한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어린애가 여기서 일하네.”
“그러게."
그녀는 몇 테이블 건너편,
다른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고 있었다.
요한이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요즘은 애들도 다 이렇게 일하는구나.”
"생각보다 나이가 많을 수 있어"
"너는 옹이눈이냐? 누가 봐도 니 또래..."
요한은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니 얼굴은 왜 그러냐?
너 진짜 10대 맞냐?"
"오늘 술값은 꼭 요한이 계산해"
“죄송합니다 형”
입으로는 요한과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머릿속은 그녀로 가득했다.
잔을 채워주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그 작은 어깨와 가느다란 목선이
머릿속에 자꾸 남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쑥 들이닥쳤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안돼, 이런 건 아니지.”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흔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에서도
명확하게 들을 수 있는 불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남자 한 명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다.
“이름이 뭐야?”
그녀는 단호하게 팔을 뺐다.
“손대지 마세요.”
“뭐야, 장난 좀 했다고.”
남자는 웃으며 말했지만,
불쾌한 얼굴이었다.
요한이 찌푸린 얼굴로 낮게 말했다.
“야, 저 자식 뭐야.”
나는 술잔을 놓았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동시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남자의 시선은 아래로 향해 있었고
그곳은 그녀의 엉덩이였다.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
그의 손은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같이 앉아서 한 잔 어때?”
그녀는 말없이 돌아섰다.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탁—.
술집 안이 조용해졌다.
남자는의 얼굴이 굳더니 벌떡 일어났다.
“뭐야 너!”
그가 테이블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잔이 쏟아지고, 술이 바닥에 튀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런 내 반응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것이다.
이런 일은 흔했고,
이런 곳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왜 화가 나는 걸까?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당혹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였다.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휘말리기 싫다는 눈빛이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늘 그랬듯,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저 모습들이 예전의 나 같아서 짜증 났다.
나는 천천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남자와 레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가 나를 노려봤다.
“뭔데, 끼어들고 그래?”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앉아.”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걸 내가 알면… 이 상황이 달라지긴 해?”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입 조심해. 진짜 큰일 나기 전에.”
“큰일을 낼 수 있기는 하고?”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란하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자는 어딘가 할 말을 찾으려 입을 달싹였지만,
더는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가 흔들렸고, 주먹을 말았지만
소리는 들리진 않았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난 개쓰레기야. 나랑 싸울 수는 있을까?.”
남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뭔가 더 욕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씨발”
그는 의자를 밀치고,
문을 발로 차듯 열고 나갔다.
문이 쾅하고 닫히자
잠잠했던 공간에 낮은 숨소리와
술잔 부딪는 소리만 남았다.
아무도 손뼉 치지 않았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잔을 들 뿐이었다.
공기엔 묘한 흐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누군지
아는 것 같았다.
“나 같으면 안 나섰을 거야.”
어딘가에서 들리는 중얼거림.
“괜히 잘난 척하다가 뒤탈 나지 말고…”
괜히 기분 나쁜 게 아니다.
이건 분명 나를 향한 말이다.
그때, 한 중년 사내가 내 옆에 다가왔다.
나는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는 가볍게 코를 훌쩍이며 말을 꺼냈다.
“내가 조언 하나 해주지.”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저놈 아비가 누군지 아나?
뒷골목에서 꽤 악명 높은 사람이지.
이 바닥에서 함부로 엮이면 골치 아파져.”
그는 잔을 한 번 들고나서,
일부러 무심한 척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그렇게 생각 없이 나서는 건...
좀 만용일 수도 있어.
이 바닥 오래 살아보면 알게 되지.”
그 정적을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할 말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저씨는 좀 웃기네요.”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의 뺨을 때린 여자였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와
중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엔 분노도, 공포도 없었다.
단단하고, 차가웠다.
“뭐라고?”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녀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어립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의 눈을 보고 자랐죠.
그래서 사람의 눈을 통해
마음을 잘 읽는다고 자부할 수 있죠, "
그녀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었다.
“당신을 포함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눈도 봤습니다.”
그녀의 뺨에 희미한 홍조가 번졌다.
아마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내가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착각하지 마세요.
아까 저는 도와달라고 쳐다본 게 아닙니다.
이 상황이 난처했지만,
여기서 일하는 입장으로
여러분들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의 눈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방관.
아까 당신이 말한
뒷골목 어쩌고 하는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다시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저 같은 애가 나쁜 일을 겪더라도
세상은 모른 척할 수 있죠
당신도 그랬고요
히지만 이분들에게는
적어도 박수는 치지 못할망정,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겁을 주진 말아야죠.”
중년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계속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여기 모두 힘에 굴복해서
죄책감이 들었던 건가요?
그러면서 ‘현실적인 판단’이라는 핑계로
합리화하려 하니까... 참, 우습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술집 안은 숨조차 삼키기 조심스러웠다.
중년 사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이년이 지금 어디서 입을 놀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떨렸다.
그는 마치 한 대라도 쳐야
속이 풀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그의 눈은
나와 어느새 옆에 다가온 요한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작은 기침 소리 하나.
그리고 다시, 조용한 술잔 부딪는 소리.
그날 밤 술집은 조용해졌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괜히 부끄러워 시선을 거두고
요한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가게를 나서는 순간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녀가 서 있었다.
술집 안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고마워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를 위해 나서줬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한 건 없는데.”
그녀의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은 따뜻한 꽃기운 내뿜었다. 그리고는 나를 감싸
가게 문 너머로 들려오는 시끌벅적함도
옆에서 하는 요한의 말도
모두 막아내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웃음
그 웃음에 숨을 잊었다.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지만
저 아름다운 입가에서 나오는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제 이름은 레나예요.”